[만남] 김명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사장
50여년간 ‘최초’ ‘처음’ 수식어
“현재에 충실한 삶이 원동력”

김명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사장 ⓒ여성신문
김명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사장 ⓒ여성신문

52년이 걸렸다. 여성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사장을 맡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김명자(78) 이사장은 1971년 설립된 KAIST의 첫 여성 이사장이다. 김 이사장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자, 정부, 학계, 과학기술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유리천장’을 깨부수는 과정이었다. 헌정사상 최장수 여성 장관과 여성 국회의원 최초 국회 국방위원회 간사를 거쳤다. 민간부분에서 여성 첫 대기업 이사회 의장(효성)을 맡았고, 2016년엔 여성 첫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김 이사장은 “유리천장을 깨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며 “그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내 몫의 삶을 살았더니 여기까지 왔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려운 과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 성취감을 느끼고,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했다. 별명인 ‘일벌레’다운 면모다. 50년 넘게 ‘유리천장’을 부수는 삶이 고단할 법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산수연(80세)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늘 재능을 내어준다.

-카이스트 설립 이후 최초의 여성 이사장으로 선임돼 5개월을 보내셨는데, 가장 중점을 두고 살펴본 분야는 무엇이었나.

“제 커리어의 마지막에서 보람 있는 일을 할 기회라 생각해서 열심히 살고 있다. 평소에 여성, 남성 리더십을 구분하기보다는 ‘합리성과 감성의 리더십’을 강조하는 편이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어머니 마음으로 살피게 됐다. 카이스트 구성원이 스트레스 덜 받고 자신의 일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면서, 계속 의견을 들어 어려움은 덜어주고 힘은 실어주는 울타리 역할을 하고 싶다. 다행히 모두들 열정이 뜨겁고 사명감이 커서 잘되는 집안(?)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5개 단과대학 별로 순회하며 많은 분들을 만났고, 임원은 물론 부설기관과도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꽃다발에다가 제 얼굴 사진이 들어간 환영 케이크까지 받아 감동스러웠다. 이사장이 여성이 되고 보니, 일부러 강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다양성에 관심을 많이 갖는 효과(?)가 느껴진다. 평소에 인문학적, 전인적 소양을 갖춘 과학기술 인력 양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소양을 갖출 수 있는 학풍과 교육과정, 훈련 프로그램을 강조하고 있다. 길게 보면 과학기술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인문학적, 전인적 덕목이 보람 있게 잘 사는 인생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내년 R&D 예산이 올해보다 16.6%가 감액된 25조9000억원이다. 지속적인 사업 구조조정을 예고하는 정부 R&D 제도혁신 방안도 함께 발표됐는데.

“30여년 만에 R&D 예산이 줄었다고 과학기술계의 우려가 크다. 특히 기초연구사업은 수천만원 규모부터 여러 단계로 구성돼 신진, 중견, 리더급 연구자로 올라설 수 있는 성장 사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데, 예산 삭감으로 후속세대와 신진 연구자의 첫 단계가 무너질 것이란 지적이다.

그동안 정부가 어려운 재정 여건에도 불구하고 계속 GDP 대비 R&D 예산 비중을 높게 유지한 것은 예컨대 블룸버그 통신의 세계혁신지수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요인이 됐다. 그러나 성과를 보면 예컨대 특허출원 건수는 높지만 활용 건수는 저조하고, 정부 R&D 과제의 성공률은 90%가 넘지만 사업화 성공 건수는 극히 저조하다. 그러다 보니 R&D 과제의 기획·선정·평가에서 전문성과 공정성이 떨어져 부실을 초래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한계를 극복해 열강과 겨룰 수 있고 엄중한 국내외 위기적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이 과학기술혁신과 첨단산업 역량 강화를 통한 경제안보 전략의 실행력 강화라고 본다. 따라서 정부와 과학기술계의 책무가 실로 막중하고, 과학기술계가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정부와 사회의 지원이 매우 중요하다.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한다면, 재정 수지가 악화되는 가운데 복지와 재난 등 다른 부문의 예산 증액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R&D 예산을 계속 증액하지 못한다면 R&D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혁신으로 보완을 해야 한다. 

R&D 비효율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저해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을 찾는 작업에서 과학기술계와 정부가 역할을 해야 한다. 과학기술계는 R&D 예산이 제대로 쓰일 수 있도록 목표와 방향을 잡는 실행자로서 R&D 관리 정책의 개선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정부는 그 방향으로 R&D 매니지먼트를 혁신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상생의 길이라고 본다.”

-앞으로 한국이 과학기술의 선도 국가로 도약하기 위해 어떤 방안이 필요하다고 보시는지.

“R&D 재정 투입 대비 경제적, 사회적 성과를 높이는 것이 과학기술 선진화의 과제다. 특허 활용율을 높여 좋은 일자리와 경제성장을 추동해야 한다. 기초연구 결과가 저명 학술지 게재에 그치지 않고 특허 출원, 기술이전, 벤처기업 설립으로 이어져 상용화와 시장진입의 선순환이 이루어질 때 선진과학기술 강국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기술혁신 생태계의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장애요인을 제거하는 규제 합리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첨단연구의 상용화 과정에서 특허 출원과 기술이전, 창업 관련 법적·제도적 기반을 재점검해서 연구개발 행정 지원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기초연구의 상용화가 활성화될 때 막대한 재정을 투입해서 얻어진 연구성과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세계 최악 수준의 저출산 국가로서 과학기술 후속세대의 급감이 예상되고 있어, 인적 자원에 의존해온 대한민국의 첨단 산업화에 대한 우려가 크다. 특단의 인력 활용 정책을 써야 한다는 뜻인데, 해외 인력 유입 방안을 논하기에 앞서 여성 과학기술 인력 활용의 우선순위를 높이고 은퇴 과학기술 인력의 적극 활용도 고려해야 한다.”

김명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사장 ⓒ여성신문
김명자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사장 ⓒ여성신문

-다양한 분야에서 화려한 이력을 쌓으면서 ‘여성 최초’ 기록을 세웠다. 우리 사회 곳곳의 ‘유리천장’을 부수는 과정이 지난하고 쉽지 않으셨을 텐데, 그 과정에서 꼭 지키려고 노력했던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나.

“작은 일, 큰일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대단한 목표는 세워본 적도 없고, 주어진 자리에서 그 몫을 가장 잘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유리천장을 깬다는 의식도 없었다. 한 가지 원칙을 들자면 ‘진인사대천명’으로 살고자 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면 자유롭다. 돌이켜 보니 최대한 선한 눈으로 사람들을 보고자 노력했고, 신뢰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살았던 것 같다.”

-우리 사회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대립과 배제를 넘고 공존하기 위해 ‘사회적 웰빙’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는데.

“여기까지 와보니, 개인과 사회의 웰빙에서 ‘사회적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1938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세계 최장기 하버드대학의 성인 발달 프로젝트의 연구 결과이기도 하다. 그 결론은 굿 라이프의 건강과 행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학벌도 아니고 사회적 관계였다. 50대에 인간관계 만족도가 높았던 사람은 80대에 건강하게 살았고, 따뜻한 사회적 관계를 가지면 우울증·당뇨병·심장병도 덜 걸리고 젊게 살았다고 한다. 외로움과 고립은 과음과 담배만큼 나빠서 중년에 건강이 악화되고 뇌 기능도 떨어졌다. 

따뜻하고 좋은 사회적 관계를 만들려면 체력단련을 위해 피지컬 피트니스를 하듯이 사회적 피트니스(social fitness)라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뢰·소통·감사·공감·긍정이라는 키워드를 향해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어머니들이 아이들에게 어릴 적부터 이런 가르침을 줄 수 있다면 개인의 웰빙은 물론 사회적 웰빙 구현의 가장 빠른 길이 되지 않을까.”

-여성신문이 창간 35주년을 맞았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중요성을 일깨워 4차 산업혁명 시대 국가 인적 자원 정책에서 여성인력 활용을 강조하는 기획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4차 산업혁명은 여성인력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진부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여성인력의 사회 진출을 가로막는 모성 보호 등 사회문화적 장애를 해소할 수 있는 국가 차원의 맞춤형 대책이 부실한 상황에서는 저출산의 위기는 극복하기 어렵다고 본다. 유엔(UN)이 내걸었던 ‘성평등은 모두를 위한 진보다(Equality for women is progress for all)’라는 슬로건은 맞는 말이다. 

그리고 사회적 웰빙을 위한 사회운동에 앞장서 주시기를 바란다. 최근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병리적 현상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사회적 피트니스의 중요성을 더 절감하게 된다. 웰빙을 향한 사회적 연결은 고사하고 불신·불만·반감·분노·분열이 고착되고 가히 스트레스 중독 상태이고, 정치가 부추기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에서 자살률 1위, 국민행복지수 35위이고, 최근 4년 동안 우울증 진단을 받는 2030 청년이 50% 급증했다. 사회 전반의 웰빙이 위기 수준이라는 우려를 하면서, 사회적 웰빙에 대한 사회운동으로 우리 모두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복원력을 찾는 것까지 실천에 옮기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여성신문이 이 운동에 앞장서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김명자 KAIST 이사장

김명자 이사장은 서울대 화학과 졸업, 미국 University of Virginia Ph.D(1971) 취득 후 36년간 강단에 섰다. 환경부 장관(1999~2003), 국회의원(2004~2008년)을 거쳐 현재 KAIST 이사장, 국민통합위원회 고문, 한국과총 명예회장, 한국환경한림원 이사장, 한국지속가능발전기업협의회(KBCSD) 명예회장 등으로 일하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김영삼·김대중 대통령), 국민경제자문회의(노무현 대통령), 사회통합위원회(이명박 대통령) 등을 지내고 최근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국제자문관(IAP), KAIST 총장자문위원, 서울대 총장자문위원, 효성 이사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