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순 희곡 ‘의붓자식’ 100년 만에 무대에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각색 연극
아르코예술극장서 성황리에 종연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부제: 100년 만의 초대)’의 한 장면. ⓒ김명집/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부제: 100년 만의 초대)’의 한 장면. ⓒ김명집/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100년 만에 되살아난 신여성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근대 최초 여성 작가, 1세대 신여성 김명순(1896~1951)의 희곡 ‘의붓자식’이 2023년 대학로 무대에 올랐다.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대표 윤사비나)가 지난 3일~5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동명의 연극으로 각색해 선보였다. 공연 첫날 객석은 순식간에 꽉 찼다. 배우 옥자연이 주연을 맡은 1회차 공연은 매진됐고 김혜수, 김옥빈 등 배우들도 극장을 찾았다.  

무대는 단출했다. 피아노와 전축, 캔버스와 화구, 책, 와인, 꽃바구니.... 세련된 취향이 드러나는 지식인의 방이다. 관 모양의 침대가 한가운데 놓였다. 글도 잘 쓰고 피아노도 잘 치고, 가부장적 인습에 저항해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외치던 젊은 여자는 여기서 죽어가고 있다.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부제: 100년 만의 초대)’의 한 장면. ⓒ김명집/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부제: 100년 만의 초대)’의 한 장면. ⓒ김명집/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부제: 100년 만의 초대)’ 주인공 성실(옥자연 분).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부제: 100년 만의 초대)’ 주인공 성실(옥자연 분).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주인공 ‘성실’은 눈 밝고 재주 많고 용감한 신여성이다. 성실과 동생 탄실에게 집은 지옥이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매정하고 폭력적이다.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실과 탄실이 발칙하다며 매질하고, 폐병을 앓는 성실더러 “연극인지 피아노인지 기생질이나 하고, 병든 몸 누가 데려갈 리도 없고”라며 한탄한다. 계모와 이복 여동생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성실과 탄실을 괴롭힌다. 성실의 애인 영호와 이복 여동생 간 혼담이 오가면서 성실은 더욱 괴로워한다.

원작자 김명순은 1920년대 중반 조선에서 명성을 떨친 신여성이었다. 나혜석, 김원주 등과 함께 소설, 시, 희곡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근대문학 최초의 현상 문예 응모 제도에 최초로 당선됐고, 『창조』의 유일한 여성 동인이자 최초로 개인 문집을 펴냈다. 『매일신보』의 사회부 기자로 일했던 조선의 세 번째 여성 기자였다.

시대를 앞서간 게 죄일까. “남편 없는 여자는 사람 취급도 않는” 조선에서의 생활은 김명순을 절망케 했다. ‘기생 출신 첩의 딸’이라는 꼬리표, 1915년 일본 유학 중 겪은 성폭행, 남성 문인들의 2차 가해와 노골적인 무시.... 문학사에 자취를 남기기는커녕, 김명순은 쓸쓸히 생을 마감했고 오랫동안 잊혀졌다.

‘의붓자식’은 김명순이 발표한 첫 희곡이다. 주인공 성실은 김명순 본인과 닮았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당대 여성으론 드물게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 재능을 활짝 펼치고자 했지만, 부친과 계모에게 학대당하고 세상은 그를 손가락질한다는 설정도 비슷하다. 눈 밝은 독자들만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오해와 편견을 깨고 있는 그대로의 한 인간을 바라봐 주길 바라며 쓴 이야기였을 것이다.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부제: 100년 만의 초대)’의 한 장면. ⓒ김명집/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부제: 100년 만의 초대)’의 한 장면. ⓒ김명집/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윤사비나 연출은 지난 5년간 김명순의 작품을 연구했다고 한다. 연극은 대체로 원작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김명순의 여러 저작을 인용해 더 생생하고 급진적인 신여성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나는 단지 더 잘살기 위해 나의 이상을 좇을 뿐”이라고 당차게 선언하면서도,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에서 마치 의붓자식 같은 것”이라고 탄식하는 이 여자가 안타깝고 쓸쓸하다. 여성을 옥죄는 가부장제도,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의문 속으로 뛰어들어 고통받고 번민하는 여성들의 모습도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배우들의 호연이 빛났다. 드라마 ‘퀸메이커’, ‘슈룹’, ‘마인’ 등에서 열연한 옥자연, 연극 ‘별들의 전쟁’, ‘공주들’, ‘344명의 썅년들’ 등에 출연한 강주희가 성실 역을 맡아 열연했다. 이재남과 이찬솔(영호 역), 조정근(세 자매의 부친 역), 허이레(부실 역), 이경구(탄실 역), 황재희(세라 역), 김희정(여하인 역), 이상구(영호 형/무라카미 역), 조인(소동 역), 김소원(소동 역)도 출연했다. 

윤사비나 연출.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윤사비나 연출.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왼쪽부터)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부제: 100년 만의 초대)’에 출연한 허이레, 옥자연, 이경구 배우.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왼쪽부터)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의 연극 ‘의붓자식(부제: 100년 만의 초대)’에 출연한 허이레, 옥자연, 이경구 배우. ⓒ문화다방 이상한앨리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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