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간 기자로 일하다 예술가로 변신
방방곡곡 돌며 대자연을 재료·캔버스 삼아
“추상·즉흥·끊임없는 질문이 나의 예술”
개인전 ‘疊疊: 첩첩’ 개막...내년 1월7일까지 갤러리 X2

대지미술가 지나 손(58·손현주) 작가가 지난 11월30일 자신의 개인전 ‘疊疊: 첩첩’이 열린 서울 강남구 갤러리 X2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세아 기자
대지미술가 지나 손(58·손현주) 작가가 지난 11월30일 자신의 개인전 ‘疊疊: 첩첩’이 열린 서울 강남구 갤러리 X2에서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세아 기자

일간지 기자로 20년간 일하다 사표를 냈다. 오랫동안 품은 예술가의 꿈을 좇기로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 안면도로 갔다. 섬을 돌며 사진을 찍고 전시를 열었다. 52세에 프랑스 파리 베르사유시립미술대학에 편입해 수석 졸업했다.

대지미술가 지나 손(58·손현주)의 인생 궤적은 흥미진진하다. 50대에 예술가로 인생 2막을 열었다. 

대자연이 그의 재료고, 캔버스고, 미술관이다. 조선 시대 기와집 한 채 분량을 해변에 옮겨 파도에 휩쓸리며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고(‘바람, 물, 기와’), 서해안에 튜브 1000개를 띄워 코로나19에 대한 저항을 표현했다(‘PLAY BUOY’). 불탄 인왕산 숲에 물의 기운을 상징하는 황금 욕조를 놓고(‘황금연못’), 땅에 꽃을 심듯 색색의 자투리 천을 길게 세워 심었다(‘여름에 피는 색’). “자연의 맥동에 의해 작가의 의지가 해체되거나 변이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조선 시대 기와집 한 채 분량을 해변에 옮겨 파도에 휩쓸리며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본 대지설치 작업 ‘바람, 물, 기와’(2021). ⓒ지나 손/갤러리X2 제공
조선 시대 기와집 한 채 분량을 해변에 옮겨 파도에 휩쓸리며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본 대지설치 작업 ‘바람, 물, 기와’(2021). ⓒ지나 손/갤러리X2 제공
지난 6월 인왕산 숲 속에 설치된 작품 ‘여름에 피는 색’(2023)과 지나 손 작가의 작업 장면. ⓒ자하미술관 제공
지난 6월 인왕산 숲 속에 설치된 작품 ‘여름에 피는 색’(2023)과 지나 손 작가의 작업 장면. ⓒ자하미술관 제공
지나 손, 월하만물도(月下萬物圖, Nr.1017), 194×157㎝, oil stick, oil pastel, acrylic on canvas, 2023. ⓒ지나 손/갤러리바움
지나 손, 월하만물도(月下萬物圖, Nr.1017), 194×157㎝, oil stick, oil pastel, acrylic on canvas, 2023. ⓒ지나 손/갤러리바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귀국해 팔도강산 방방곡곡을 다니며 작업을 선보였고, 올해 ‘키아프 서울’에선 단독부스로 강렬한 색채의 회화 작품들을 선보여 완판했다. 인왕산 자락에 묻은 천을 기어이 뚫고 올라온 돼지감자 싹처럼,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생명력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

“제 작업은 추상적이고 즉흥적이에요. 무엇을 명확히 규명하거나 따라 하려 하지 않아요. 그때그때 내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흐름을 따라요. 연필과 오일파스텔을 즐겨 써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요.”

연막탄에서 피어오른 연기를 이용한 ‘허공을 그리다’(2021). ⓒ지나 손/갤러리X2 제공
연막탄에서 피어오른 연기를 이용한 ‘허공을 그리다’(2021). ⓒ지나 손/갤러리X2 제공
지나 손, ‘허공을 그리다_Living Creatures Under the Moon Light 월하만물도 月下萬物圖 (Nr. 1102)’, 116x91cm, oil stick, oil pastel, oil on canvas, 2023 ⓒ지나 손/갤러리X2 제공
지나 손, ‘허공을 그리다_Living Creatures Under the Moon Light 월하만물도 月下萬物圖 (Nr. 1102)’, 116x91cm, oil stick, oil pastel, oil on canvas, 2023 ⓒ지나 손/갤러리X2 제공

요즘은 ‘허공’을 탐구한다. 불교경전 ‘장엄염불’ 중 ‘허공위승무불관(虛空爲繩無不觀, 허공이 끈이 되어 꿰지 않음이 없다)’에서 영감을 얻었다. 강변에 연막탄을 든 여성들을 세웠다. 검은 연기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번진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먹물 추상화 같다. 이렇게 허공을 캔버스로 쓴다. 작가가 허공을 향해 붓질하는 모습을 촬영한 ‘허공 드로잉’도 선보였다.

“과학자나 철학자와는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넘어서는 영역을 탐색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게 예술가의 기본”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새로운 실험과 개념작업을 통해 일상적인 관습, 질서, 보편성에 질문을 던질 계획이다.

지나 손 작가가 지난 11월30일 자신의 개인전 ‘疊疊: 첩첩’이 열린 서울 강남구 갤러리 X2에서 600년 된 기와와 오브제를 쌓아 올려 이질적인 두 물질이 탑을 이루면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갤러리X2 제공
지나 손 작가가 지난 11월30일 자신의 개인전 ‘疊疊: 첩첩’이 열린 서울 강남구 갤러리 X2에서 600년 된 기와와 오브제를 쌓아 올려 이질적인 두 물질이 탑을 이루면서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끌어내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갤러리X2 제공

올해 초 투병과 수술을 거치면서 안면도를 떠나 서울에 왔다. 종로구 평창동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집 앞 작은 잔디밭을 맨발로 딛고 밤하늘을 바라보는 게 요즘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다 보면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어요. 무수한 것들로 가득한 이 우주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지요.”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격려를 보냈다. “존경하는 스님의 말씀인데요. ‘저 파도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계속해서 나아가세요. 생각에만 머무르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중요해요.

대지미술가가 된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아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설치 작업도, 여성의 힘으로 자연 앞에 서서 큰일을 이뤄내는 것도 작가로서 뭔가를 해내겠다는 자존감과 집중력이 필요해요. 남자들도 못하는 일, 제가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여성이냐 남성이냐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다 열어놓으세요. ”

지나 손 작가 개인전 ‘疊疊: 첩첩’이 서울 강남구 갤러리 X2(@gallery_x2)에서 개막했다. 작가의 예술 여정을 담은 도록 같은 전시다. 주요 작업은 물론 미공개 영상·회화를 선보이고, 수첩에 에스키스로 드로잉한 요소들을 꺼내 퍼포먼스도 벌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해체되는 대지예술의 특성상 충분히 감상하기 어려웠던 작업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오는 23일엔 작가의 일상 요소를 무게로 환산해 예술의 가치에 대해 일갈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전시는 1월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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