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숙의 제주이야기]
제주도 동쪽마을 선흘1리 ‘할머니의 예술창고 2023’
마을 올레·마당·소막·우영팟 등 곳곳이 미술관으로 변신
9일 할머니 작가 12명 참여 ‘나 사는 집’ 오프닝행사 감동
17일까지 ‘소막미술관’ ‘분농미술관’ ‘마당미술관’ 등 열려

‘선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선흘마을’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난 9일 제주섬 동쪽마을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 ‘그림 그리는 할머니’들이 소중한 자신의 공간을 열어 미술관을 연 것이다. 무려 9개의 미술관이 생겼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 열린 ‘할머니의 예술창고 2023-나 사는 집’에는 할머니들의 흔적과 세월, 이야기가 넘쳐 흘렀다. 

‘그림선생’ 이사오면서 시작된 ‘할망들의 그림수업’

지난 9일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 ‘그림 그리는 할머니’들이 소중한 자신의 공간을 열어 미술관을 열었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 열린 ‘할머니의 예술창고 2023-나 사는 집’ 오프닝 행사에 작가로 참여한 할머니들와  ‘그림선생’ 최소연 작가가 함께 했다. ⓒ이현숙 편집위원
지난 9일 제주시 조천읍 선흘1리 ‘그림 그리는 할머니’들이 소중한 자신의 공간을 열어 미술관을 열었다. 지난해에 이어 두번째 열린 ‘할머니의 예술창고 2023-나 사는 집’ 오프닝 행사에 작가로 참여한 할머니들와 ‘그림선생’ 최소연 작가가 함께 했다. ⓒ이현숙 편집위원

동백동산으로 유명한 이 마을에 최소연 작가가 이사오면서 ‘할망들의 그림수업’이 시작됐다. 특히 최 작가가 올해는 사고를 당해 많이 다쳤지만 할머니들과의 약속을 저버릴수 없어 이날도 목발을 짚고 동분서주 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제주4.3을 겪어내느라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자신을 위한 시간을 써보지 못했던 할망들의 손에 붓이 쥐어졌고, 가족들이 떠난 할망의 집은 그림으로 채워져 미술관이 되었다. 최 작가는 2021년에 이사를 와서 마을산책을 하다가 마을 할머니들의 창고를 예술창고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할머니의 예술창고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그림선생’ 만나서 행복해…마음 속 말이 그림으로 나오니 그게 해방이지”라고 외쳤던 할머니들의 그림 실력은 더 늘었고 전시작들은 더 풍성해졌다. 첫 전시인 ‘할망해방일지’에 참여했던 여덟 할머니에 올해에는 12명의 할머니 작가들이 탄생했고 전시작품도 200여점으로 늘었다.

그림을 통해 ‘마음의 해방’을 얻었던 할머니들은 그림을 통해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인생이야기와 치유, 그리고 쉼을 선물하고 있다. 9일 열린 오프닝 행사에는 마을 안팎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할머니들의 집과 창고 등에는 제각각 특별한 미술관 명패가 걸렸다.

미술관 마다 삶의 흔적 빼곡… 특별전 ‘할머니의 베개’도

부희순 할머니와 ‘그림선생’ 최소연 작가. 최소연 작가가 마을로 이사오면서 ‘할망들의 그림수업’이 시작됐다. ⓒ이현숙 편집위원
부희순 할머니와 ‘그림선생’ 최소연 작가. 최소연 작가가 마을로 이사오면서 ‘할망들의 그림수업’이 시작됐다. ⓒ이현숙 편집위원

‘그림선생’은 인삿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들이 그림을 그렸다고 불러 집에 가보면 베개를 쓱 건네 주세요. 잠깐 누워서 쉬라는 거죠. 할머니들의 베개에 누워 있으면 힘들었던 고민이 사라지죠. 여러분들도 베개그림을 베고 누워보세요. 베개그림에 살짝 기대어 봐도 좋고 할머니들의 미술관에 가면 실제 베개에 누워볼 수 있어요.” 올해 할머니들이 그린 베개는 그런 쉼을 담았다. 베개 그림뿐 아니라 각 미술관 마다 독특한 테마를 잡고 전시되고 있다. 전시관이 멋진 갤러리가 될 수 있도록 주민들은 힘을 보탰다. 

홍태옥 할머니의  ‘초록미술관’은 할머니들의 그림수업의 시작됐던 공간이다. ⓒ이현숙 편집위원
홍태옥 할머니의  ‘초록미술관’은 할머니들의 그림수업의 시작됐던 공간이다. ⓒ이현숙 편집위원
오프닝 행사에 참석한 홍태옥 할머니(오른쪽)와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이현숙 편집위원
오프닝 행사에 참석한 홍태옥 할머니(오른쪽)와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이현숙 편집위원

홍태옥 할머니(1937년생)의 ‘초록미술관’은 할머니들의 그림수업의 시작됐던 공간이었다. 할머니의 창고에서 그림선생은 인근 볍씨학교 친구들과 함께 찾아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홍 할머니가 “나도 한번 그려보카?”로 시작된 것이다. 밥먹던 상이 그림그리는 상이 되었고,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올해 대표작도 밥상그림이다. 

강희선 할머니(1937년생)의 ‘소막미술관’은 소를 키웠던 외양간이 미술관이 됐다. 강 할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소와 사랑하는 강아지 벅구, 농사지은 호박이다. 이 모든 것들이 고스란히 화폭에 담겼다. 

강희선 할머니는 소를 키웠던 외양간이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소막미술관 내부 모습. ⓒ이현숙 편집위원
강희선 할머니는 소를 키웠던 외양간이 미술관으로 변신했다. 소막미술관 내부 모습. ⓒ이현숙 편집위원
강희선 할머니의 소막미술관에 걸린 작품. 강 할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소와 사랑하는 강아지 벅구, 농사지은 호박을 화폭에 담았다. ⓒ이현숙 편집위원
강희선 할머니의 소막미술관에 걸린 작품. 강 할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소와 사랑하는 강아지 벅구, 농사지은 호박을 화폭에 담았다. ⓒ이현숙 편집위원

오가자 할머니(1940년생)의 ‘그림창고’는 농기구 창고가 미술관이 됐다. 오 할머니는 “내년에도 그림 그리멍 살아질건가?(그림그리면서 살수 있을까?)”라며 “이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

동백미술관 박경일 할머니(1935년생)는 놀라운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아들은 “치매가 있는데도 집중해서 그림을 그릴 때 해맑게 웃는 행복한 모습이어서 그림치료의 효과를 제대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부희순 할머니(1935년생)는 ‘분농미술관’을 열었다. 미술관에는 다양한 색감을 분농(분홍)색 가득한 작품들을 고루 만날수 있다. 할머니의 ‘분홍운동화’를 시작으로 올해 전시회는 ‘분홍색 잔치’이다.

김옥순 할머니(1945년생)의 ‘우영미술관’은 할머니의 마당 우영팥에서 농사지은 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이름지어졌다. ‘일평생 밭일하고 살아왔어’같은 의미있는 작품이 걸려있다.

박인수 할머니(1950년생)은 오른손을 움직일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큰 사고가 나도 그림지도를 포기하지 않는 ‘그림선생’과의 약속으로 ‘황금창고’를 열었다. 황금향 농사를 짓는 할머니의 작품에는 황금향나무가 멋드러지게 담겼다.

고순자 할머니(1939년생)는 ‘올래미술관’을 열었고 허계생 할머니(1953년생)은 ‘생이미술관’에서는 새가 되어 날고 싶은 마음을 담은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실력이 남다른 허계생 할머니는 선흘곶 새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그렸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 처럼 여자를 너무 하시봐서(낮게 봐서) 속상했다”며 “암탉이 울어야 날이 새고 달걀을 낳는다고 그림에 썼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왕언니 조수용 할머니(1930년생), 김인자 할머니(1937년생), 윤춘자 할머니(1935년생)의 미술관도 볼 수 있다.

마을의 행복한 잔치였던 오프닝 행사

이날 사회를 본 ‘전시 선생’ 장문경 기획자는 “이번 행사가 이뤄지는데 도움을 준 이들이 정말 많다”며 “처음에는 그림을 감추던 할머니들이 올해는 너무 많은 그림을 가려 전시작을 추리는데 어려웠을 정도로 작가로 빛을 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할머니들의 그림수업은 할머니 뿐 아니라 마을에 많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런 변화를 이끄는데는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의 제언도 있었다. 이날 참석한 그는 “마을에 일어나고 있는 기적같은 일을 하나씩 풀어낼 필요가 있다”며 “모든 사람은 예술가로 삶을 마감할 권리가 있고 우정과 환대를 생성하는 이런 마을세포가 반복적으로 재생되면서 이 시대의 우울을 벗겨내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마을에는 여러가지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할머니들의 우정과 환대가 열리면서 동네 초등학교는 학생수가 늘어서 본교로 승격했고, ‘비건책방’도 생겼다. 효모를 만드는 청년협동조합도 생겼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제주시내로 나갔던 청년들이 할머니의 그림들로 굿즈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가족들의 전폭적인 응원으로 할머니들의 창작열기는 마을 이웃의 집에 놀러가면 그림을 그려 선물하기도 한다. 오프닝 행사가 있던 마을은 그야말로 동네축제였다. 작가도 관람객도 낯선 이방인도 다양한 먹거리 선물을 받았고 곳곳은 축하와 응원의 발걸음과 감동의 눈물이 이어졌다.

선흘1리(이장 부상철)는 ‘세대를 아우르는 미술관마을, 뮤지엄 선흘’을 선언했다. 2024년도 제주형 마을만들기 사업에도 선정됐다. 오중배 뮤지엄선흘추진위원장은 “치매를 앓고 계신 어머니의 변화가 마을의 변화를 고스란히 이야기해주고 있다”며 “다양한 세대를 위한 마을공간을 갖춘 마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행사는 부상철 선흘1리 이장도, 오중배 뮤지엄선흘 추진위원장도,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도, 김남흥 돌하르방 미술관장도, 동네목수도, 지역 도의원도, 다시 동네로 돌아온 동네청년들도 모두 감동의 눈물과 웃음이 오락가락 했던 날이었다.

전시 기간동안 9개의 미술관은 ‘그림작업장’인 선흘체육관(선흘동2길 31)을 중심으로 마을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만날 수 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다. 전시 기간 중 금요일과 토요일, 일요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는 마을 해설사, 주민들이 안내하는 무료 전시투어도 진행된다. 그 어떤 규모의 비엔날레도 이보다 감동적일 수 없다. 삶이 힘들다면 꼭한번 들려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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