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끼리 주짓수 스파링을 하는 모습. 사진=양민영 작가 제공
여성끼리 주짓수 스파링을 하는 모습. 사진=양민영 작가 제공

지난 토요일, 5년 전부터 주짓수를 함께 수련했던 L이 퍼플 벨트를 받았다(주짓수 승급은 화이트·블루·퍼플·브라운·블랙 순으로 이뤄지고 블랙 벨트는 자격을 갖춘 수련자에게 벨트를 수여하는 권한을 갖는다). L은 내가 주짓수 도장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블루 벨트를 메고 있었다. 체구도 크지 않은 그가 남자들과 스파링하는 모습은 ‘내가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을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로 바꾸어놓았다.

주짓수를 수련해 본 사람은 ‘벨트는 출석만 꾸준히 해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성이 격투기 체육관에 꾸준히 다니는 건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막연히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남성중심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에 L과 나는 일본 오사카에서 주짓수 도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안내받았다. 시설이 열악한 곳인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 고층 건물 내에 있는 도장이었다.

할 수 없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 10년도 더 된 기억을 떠올렸다. 동네에 새로 생긴 도장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창문에 ‘주짓수’ 세 글자가 크게 적혀 있고 온통 샛노란 색으로 칠해진 체육관이었다. 그 색이 브라질을 상징하는지도 몰랐지만 어쩐지 재미있어 보였다. 며칠 뒤에 용기를 내서 찾아갔지만 결국 등록하지 못하고 그냥 나왔다. 비록 ‘여자 사절’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지 않았으나 한눈에 보기에도 여성에게 우호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혼자 들어가도 꽉 찰 것 같은 비좁은 샤워실이 마뜩잖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걸림돌은 여성 관원을 반기지 않은 분위기였다.

이러한 진입 장벽을 뛰어넘어도 격투기 체육관에서 여성이 받는 대우는 미묘한 구석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여성 관원이 신입으로 들어오면 오래된 여성 관원이 그를 전담하다시피 한다는 거다. 같은 여성이니까 서로 편하다는 구실을 내세우지만 적절치 못한 처사다. 오래 훈련했다고 해도 그 또한 수련하는 입장이고 나름대로 더 배우고 싶은 게 있을 텐데, 코치도 아닌데 걸음마를 떼는 신입을 맡을 이유가 없다.

앞서 언급한 문제는 모두 격투기 체육관 내 여성 관원의 수가 부족한 데서 비롯된다. 여성의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여성을 위한 시설은 갖춰지지 않고 분위기도 남성중심적으로 흘러간다. 지금 나는 여자 샤워실의 샤워기가 무려 여섯 개인 도장에 다니지만 여전히 자주 볼 수 있는 여성의 수는 네 명을 넘기기 힘들다. 혼자만 여성인 날도 적지 않다.

여성 관원이 이탈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애초에 너무 소수라는 데 있다. 그리고 여성이 하나씩 떠날 때마다 우리는 ‘여자는 관둔다’는 말을 듣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지 않은가? 결혼, 출산, 육아 등으로 커리어를 중단할 때처럼 여성들은 체육관에서조차 일종의 순환논리에 갇힌다. 그러므로 어떤 도장을 가도 퍼플 벨트 이상의 상급자 여성은 극소수다. 그들은 보통 도장을 운영하는 관장의 여자친구나 아내인 경우가 많고 코치를 겸한다. 그러니까 L이 받은 퍼플 벨트는 단순히 오래 수련해서 받은 벨트가 아니다. 그 모든 어려움에도 수련을 그만두지 않은 끈기의 결과물이다.

사실 그는 더 일찍 승급할 수 있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에 주짓수를 시작한 남성들은 모두 일찌감치 퍼플 벨트를 받았다. 내가 L에게 어서 퍼플 벨트를 받아야 한다고 할 때마다 그는 벨트에는 욕심이 없다고 말했다. 벨트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거다. 경험상 이 비슷한 말을 한 이들은 전부 여성이다. 승급식을 마치고 L에게 같이 블랙 벨트를 받을 때까지 수련하자고 했다. 하지만 이제 블루 벨트인 내가 어떻게 그 긴 과정을 완성할 거라고 장담하겠는가. 그러나 상상은 해볼 수 있다. 블랙 벨트를 받고 완성 단계까지 수련한 자의 권한으로, 어렵게 수련한 여성들에게 벨트를 주는 상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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