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약자 입막음에 악용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한 번 훼손된 명예 회복 어려워” VS “사실 적시로 손상되는 명예는 헛된 명예”
사실적시 명예훼손 형사처벌 않는 국제 추세…여야 의원 모두 관련 개정안 발의

타인의 사실을 적시해 명예와 인격권을 훼손하는 행위를 방지하고자 만들어진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심판을 받는다.  ⓒ김영서 작가
타인의 사실을 적시해 명예와 인격권을 훼손하는 행위를 방지하고자 만들어진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심판을 받는다. ⓒ김영서 작가

타인의 사실을 적시해 명예와 인격권을 훼손하는 행위를 방지하고자 만들어진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심판을 받는다. 해당 법률이 성폭력·양육비·학교폭력 피해자 등의 사회적 약자가 사건을 공론화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막는다는 이유다.

사회적 약자 입막음에 악용되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양육비를 주지 않는 ‘나쁜 부모’의 신상을 공개해 처벌받은 구본창 양육비해결하는사람들(옛 배드파더스) 대표는 1월 25일 여성신문에 “헌법재판소에 판결 근거인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등에 관한 법률 제70조 1항(명예훼손)’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한다”고 밝혔다.

형법 제307조 1항과 정보통신망법 제70조 1항은 모두 사람을 비방할 목적으로 공공연하게 사실을 드러내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에게 징역형 또는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는 법률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라 불린다. 각각 형법 제310조와 판례에 따라 고발의 공익적 목적이 인정되면 처벌하지 않는다.

해당 법률은 한 번 훼손되면 온전히 회복하기 어려운 명예의 특성상 명예훼손적 행위를 방지하고자 제정됐다. 그러나 성폭력·양육비·학교폭력·임금체불 등 법적 처벌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사건이 공론화됐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의 입을 막는 구실로 악용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스쿨미투 당사자들은 고발에 나선 순간부터 학내에서 가혹한 공격을 받았다. 피해 경험을 떠올리고 말하는 것도 힘든데, 쏟아지는 비판과 조롱은 더 큰 상처가 됐다.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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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는 구본창 대표의 경우 양육비 이행명령·감치명령 등 사법부의 판결로도 양육비를 주지 않는 비양육자의 신상을 공개해 양육비 지급을 촉구하는 사이트 ‘배드파더스’를 운영하다 벌금 100만원에 선고유예형을 받았다.

유튜브를 통해 학교폭력 피해사실을 고백한 고 표예림씨는 학폭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에게 “자신들의 신상을 공개한 유튜브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보내고, 요구를 따르지 않을 시 명예훼손으로 법적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협박당했다. 이에 표씨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을 내며 ”특정인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명예훼손이 되는 조항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장 및 학교 등에서 벌어진 성폭력을 고발하는 미투(Metoo) 운동이 한창일 당시에도 신상이 공개된 가해자들이 피해사실을 고발한 이들에게 명예훼손 및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이 잦았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사실만 고발했더라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해 고소와 공론화를 취소하곤 했다.

구 대표는 “사회적 약자가 당한 피해는 세상에 알려지면서 문제 해결이 시작된 경우가 많은데, 이를 사적제재라는 이유로 처벌을 내린다면 국가가 사회적 약자에게 '아무리 피해가 심하고 억울하더라도 입을 꾹 닫고 살라'고 강요하는 것”이라며 헌법소원 청구 취지를 밝혔다.

헌법재판소 ⓒ연합뉴스
헌법재판소 ⓒ연합뉴스

“한 번 훼손된 명예 회복 어려워” VS “사실 적시로 손상되는 명예는 헛된 명예”

앞서 헌법재판소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헌법을 위반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왔다. 정보통신망법 제70조 1항의 경우 2016년 재판관 합헌 7, 위헌 2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냈다. 2021년에는 형법 제 307조 1항에 대해 합헌 5, 위헌 4 의견으로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 채 합헌이라 결정했다.

찬성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온라인 공간의 팽창 등으로 사실 적시 매체가 다양해지고 전파 속도와 파급 효과가 커진 현실에서 “일단 훼손되면 완전한 회복이 어려운 명예의 특성상 명예훼손적 표현 행위를 제한할 필요성은 더 커졌다”고 판단했다.

또한 사실 적시 내용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면 처벌을 면하도록 한 현행법을 들어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가 공적 인물과 국가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반대 의견을 재판관들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과잉금지원칙에 반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봤다. 표현의 자유는 핵심적 기본권인 만큼 최소한으로 제한해야 하고, 국가나 공직자가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한 형사처벌 주체가 될 경우 국민의 감시와 비판이 위축되며, 진실한 사실의 적시로 손상되는 명예는 헛된 명예에 불과하다는 점 등이 근거다.

또한 이들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피해를 봤다고 하더라도 정정보도·반론보도·손해배상 청구 등 민사상 절차로 구제받을 수 있다”는 점도 근거로 들었다.

5년 새 위헌 의견이 크게 늘어난 만큼 이번 헌법소원심판에서 헌재의 위헌 결정을 기대한다는 것이 구 대표 측의 입장이다. 헌법소원 대리를 맡은 손지원 사단법인 오픈넷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문제를 지적하는 의견이 늘고 있고,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헌법재판관 구성원이 대폭 바뀌는 만큼 합헌 결정이 뒤집힐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배드파더스’ 사이트 첫화면
‘배드파더스’ 사이트 첫화면

사실적시 명예훼손 처벌 않는 국제 추세…여야 의원 모두 관련 개정안 발의

해외의 경우 명예훼손을 형법상 범죄로 처벌하는 국가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은 사건 대부분을 민사상 손해배상 문제로 다루고 있으며, 영국은 2010년 선동적 명예훼손죄 및 사인 간 명예훼손죄를 폐지했다.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일본 등은 명예훼손 처벌 시 적시된 내용이 사실인 경우 처벌을 면할 수 있는 규정을 두고 있다.

국제기구 또한 한국에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를 권고해왔다. 유엔인권위원회와 유엔 산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위원회(ICCPR)는 각각 2011년과 2015년 한국에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를 권고했다.

국회도 여야를 막론하고 국제 추세를 반영한 법안을 발의했다. 지난 2021년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허위가 아닌 사실을 적시한 경우에도 이를 불법정보로 규정하고 벌칙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것"이라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내용의 형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헀다.

조은희 국민의힘 의원도 지난 2022년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양육비 지급을 촉구하는 행위,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미투, 노동자가 임금 체불이나 직장 갑질 피해를 호소하는 행위 등 사회적 약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제약할 우려가 있다”며 형법·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손지원 변호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 폐지로 발생할 수 있는 신원정보, 프라이버시 침해 등의 문제는 개인정보보호법이나 통신비밀보호법 등으로 방지해야 한다"며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사실을 공개한 경우에만 처벌하는 규정으로 개정하는 방법도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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