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3월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 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3.8 여성선언’에 맞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여성신문  
지난 2018년 3월 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 34회 한국여성대회에서 참가자들이 ‘3.8 여성선언’에 맞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여성신문  

1908년 3월8일 미국 뉴욕의 러트거스 광장에 여성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의류공장 노동자 1만5000여 명. 전례없는 첫 여성 대규모 시위였다. 숨도 쉬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던 여성들은 그것이 성차별이라는데 더 분노했다. 이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 노동환경 개선과 여성 투표권을 요구하며, “Bread for all, and the roses too!”(모두에게 빵을, 모두에게 장미를!) 구호를 외쳤다. 빵은 생존권을, 장미는 참정권을 뜻했다. 

무려 한 세기도 전인 이 날 이들의 대규모 궐기와 절박한 외침은 여성의 권리와 지위 향상을 위한 대장정의 기폭제가 되었다. 1911년 유럽에서 첫 행사가 열린 뒤 세계 각국에서 성차별 철폐와 여성 지위 향상 등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퍼져 나갔다. 마침내 유엔은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지정하고 1977년 3월8일을 특정해 ‘세계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로 공식화했다. 그 후 3월8일은 세계 여성들이 차별적인 제도·대상과 어떻게 싸워 무엇을 얻었는지를 축하하고 기념하며, 결기를 다지는 날이 됐다. 한국은 1985년부터 기념하기 시작했는데 2018년 2월‘양성평등기본법' 이 일부 개정되면서 2018년부터 3월8일이 법정기념일이 되었다.

그 3월8일이 다가온다. 올해는 어떤 움직임이 있을까 살피던 차에 프랑스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프랑스는 세계에서 최초로 헌법상 임신중지(낙태)할 ‘자유’(권리가 아니다!)를 보장하는 나라가 됐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최상위 법에 기본권으로 명문화된 것이다. 프랑스는 이미 75년부터 임신중지가 허용되는 나라지만 미국 연방대법원이 2년전 임신 24주까지 임신중지를 허용한 1973년 판결을 폐기한 임신중지권 후퇴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개헌을 주도한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의 자부심,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평가하고, 세계여성의 날에 헌법 국새 날인식을 열어 축하하겠다고 했다. 

프랑스 의회가 4일(현지시간)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헌법 개정안을 처리하자 파리 에펠탑에 ‘나의 몸, 나의 선택’이라는 축하 메시지가 빛을 내고 있다. 파리 AFP 연합뉴스
프랑스 의회가 4일(현지시간)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헌법 개정안을 처리하자 파리 에펠탑에 ‘나의 몸, 나의 선택’이라는 축하 메시지가 빛을 내고 있다. 파리 AFP 연합뉴스

프랑스에 고무되었다면 비슷한 시기 나온 세계은행 보고서에는 머리를 된통 얻어맞은 듯 현타가 왔다. 꽤 충격적이라 하루종일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세계은행이 4일(현지시간) 발표한 ‘여성, 비즈니스와 법 2024’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 190개국에서 여성이 법적으로 보호받는 권리는 평균적으로 남성의 64.2%에 불과하다. 이동성·직장·급여결혼·부모하기·사업·자산·연금 등 8개 평가지표에다 올해 10번째 조사에서는‘여성안전'과‘보육서비스 접근성' 지표를 추가해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규가 얼마나 있는지를 평가했는데 이전 77%에서 훨씬 더 낮아졌다. 전 세계에서 여성이 누리는 권리가 여전히 남성의 3분의 2에 그치다니 이건 좀 심하다 싶다.

그런데 말이다. 남성이 100일 때 여성이 64.2라는 올해 성별 격차는 좀 더 뜯어보아야 한다. 법률이 있다고 이것이 곧 제대로 실행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계은행의 이번 보고서가 대단한 것은 이전과 달리 성문화된 법률의 유무만이 아니라 법률의 시행을 지원하는 법 집행 메커니즘과 법률의 실효성까지 추적했다는 점이다. 가령 98개국은 남녀 임금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있지만, 그중 35개국만이 급여 격차를 없애기 위한 투명성 조치나 집행 체계를 갖고 있다. 세계은행은 보고서에서“성문화된 법만 보면 여성의 권리가 남성의 64.2%로 나타나지만, 실제로 법률 시행에 필요한 예산, 감독, 제재 등의 시스템이 구축된 상태를 고려하면 여성은 남성에 비해 40% 미만(39.5%)에 그친다”며, 각국의 남녀평등 관련 법률 규정과 실제 적용의 격차가‘충격적일 정도로 크다’고 표현했다.

충격적인 것은 더 있다. 올해 처음 추적한 가정폭력과 성폭력, 여성혐오범죄, 조혼 등의 안전 지표에서 여성의 법률적 권리는 남성의 36%에 그친다. 범죄와 위협을 피해 정상적인 경제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보호 수준의 3분의 1만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분쟁 중인 이스라엘과 하마스, 우크라이나, 수단 등에서 자행된 여성 성폭력 살해범죄가 공분을 샀는데 이런 극한 상황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세계 여성들은 안전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나마 중동과 아프리카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안도해야 할까. 남성의 권리를 100으로 할 때 여성의 법률적 권리지수는 역시 중동·북아프리카(38.6%)가 가장 낮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고소득 국가(84.9%)가 가장 높았다. 한국은 어떨까. 법률 제정 측면은 82.5%이었고, 실제 법 집행에서는 74.2%, 상위권에 속한다. 좀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는 한다. 조사방법과 대상이 물론 다르지만, 지난해 6월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23년 세계젠더격차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 2023)' 결과와 사뭇 달라서다. 이 보고서에서 한국의 젠더격차지수(0.680)는 146개국 가운데 105위로 하위권에 속했다.

세계은행이 힘주어 강조한 결론은 이렇다. “여성들이 일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막는 차별적인 법과 관행을 없애면 세계 국내총생산(GDP)을 20% 이상 늘려 앞으로 10년간 세계 경제성장률을 두 배로 만들 것이다. 국가는 인구의 절반을 소외시킬 여유가 없다. 여성은 흔들리는 세계 경제에 엔진이 되는 힘을 갖고 있다.” (인더밋 길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 

어김없이 3.8은 온다. 다시 3.8이다. 세계여성의 날 기념 한국여성대회에 가봐야겠다.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용감하게 목소리를 내왔던 수많은 여성과 시민들을 만나 소통하고 연대하리라.‘ 바꾸자, 여성주권자의 힘으로! 가자, 성평등 민주주의로!’구호도 외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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