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 끝 스스로 죽음 택하는 장애여성
‘행복해질 권리’ 좇는 여정 다룬 연극 ‘비Bea’
24일까지 LG아트센터서울 U+ 스테이지

연극 ‘비Bea’ 공연 사진.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연극 ‘비Bea’ 공연 사진.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8년 넘게 침대에 누워 지내는 28살 비(Bea)의 소원은 섹스하기다. 간병인에게 그는 당당히 요구한다. “9년이나 못 했어!” “마스터베이션 해 줘!”

긴 투병 끝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여성의 이야기. 연극 ‘비(Bea)’를 이렇게만 요약하면 고통과 절망의 이야기 같다. 행복해질 권리를 좇는 사람의 이야기에 더 가깝다. 특히 가려지고 지워졌던 여성들의 감정과 욕망을 발랄하면서도 진실한 태도로 조명한다. 이 과정에서 죽음을 어렵고 피하고픈 주제가 아닌 ‘일상의 문제’로 바라보게 한다.

비는 성(性)의 즐거움에 눈뜬, 성적 권리를 요구하는 장애 여성이다. 성착취·폭력 피해자로 그려지기 일쑤던 장애 여성이 여기서는 당당한 성적 주체다. 몇몇 국가엔 장애인의 자위행위나 장애인 커플의 섹스를 돕는 서비스가 있지만 장애 남성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다. 극은 장애 여성은 무성애자가 아니며, 누구에게나 성적 즐거움 추구가 자연스러운 행위임을 비춘다. 가족을 버린 아빠 몫까지 일하고 돌보느라 바빠 새 인연을 만나지 못한 엄마 캐서린의 성 향유 욕구에 대해서도 재치 있게 다룬다. 뉴스나 통계론 알 수 없는, 피와 살이 있는 여성의 삶을 무대에서 만나는 이런 순간이 반갑다.

이토록 생기발랄한 주인공은 왜 죽고 싶어 할까. 비의 육신은 무력하다. 식사와 투약, 목욕과 배변까지 타인의 돌봄 없이 살 수 없다. 원인도 모르고 회복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잃어버린 8년, 똑같은 침대, 똑같은 생각, 똑같은 고통” 끝에 그는 '조력사(assisted dying·助力死)'를 결심한다.

동시에 비는 사는 동안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다. 비의 삶은 많은 날이 축제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뿐 ‘파티 걸’이다. 간병인의 도움으로 멋진 드레스에 구두를 신고 디스코 음악을 들으며 상상 속에서 누구보다 신나게 뛰고 춤춘다. 끼도 흥도 많은 간병인 레이와 함께 온갖 즐거운 놀이를 벌인다. 하지만 그의 삶은 ‘참 재미있었지만 다시 읽고 싶지는 않은 책’이며, 이쯤에서 산뜻하게 마지막 장을 덮기로 한다.

연극 ‘비Bea’ 공연 사진.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연극 ‘비Bea’ 공연 사진.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윤리적인 판단에 앞서, 극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사람이 얼마나 진실해지는지, 그간 회피해 온 문제들과 얼마나 용감하게 정면으로 마주하는지를 비춘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여성과 남성, 아픈 몸과 그렇지 않은 몸. 섞이지 못할 듯했던 존재들이 죽음을 계기로 서툴게나마 조금씩 이해와 공감의 몸짓을 나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동등하다. 알고 보면 저 사람도 나처럼 불완전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깨달음에 이르는 애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우리 곁의 성소수자들도 조명한다. 젊은 게이 간병인 레이가 자조 섞인 어투로 들려주는 성소수자의 삶과 생각, 소외와 차별에 관한 일침은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카롭다.

연극 ‘비Bea’ 삼연 출연진. 위부터 비 역 이지혜, 김주연, 레이 역 강기둥, 김세환, 캐서린 역 방은진, 강명주 배우.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연극 ‘비Bea’ 삼연 출연진. 위부터 비 역 이지혜, 김주연, 레이 역 강기둥, 김세환, 캐서린 역 방은진, 강명주 배우.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 제공

원작은 영국 극작가 겸 연출가 믹 고든(Mick Gordon)이 2010년 런던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캐나다 몬트리올, 토론토, 퀘벡과 그리스 등지에서 무대에 올랐다. 한국에선 크리에이티브테이블 석영이 제작을 맡아 2016년 초연, 2019년 재연에 이어 세 번째 시즌으로 돌아왔다.

단출한 무대를 배우 셋이 꽉 채운다. 주인공 비 역 이지혜·김주연, 엄마 캐서린 역 방은진·강명주, 간병인 레이 역으로 강기둥·김세환까지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배우들만 출연한다. 최근 세계적인 동물학자이자 장애 여성인 템플 그랜딘의 삶을 다룬 연극 ‘템플’에서도 주인공으로 열연했던 김주연 배우의 연기가 특히 긴 여운을 남긴다. 24일까지 LG아트센터서울 U+ 스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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