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 미술관의 필립 파레노 개인전 ‘보이스’

필립 파레노. ⓒ김제원 촬영/리움미술관 제공
필립 파레노. ⓒ김제원 촬영/리움미술관 제공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 <보이스>(VOICES)가 리움 미술관에서 2월 28일부터 열리고 있다. 리움 미술관이 개관 20주년을 맞아 여는 대규모 전시회다. 이번 전시에서는 19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파레노의 대표작 40여점을 ‘보고 들을’ 수 있다. 리움은 이번 전시회를 위해 개관 후 처음으로 고미술 소장품이 전시된 상설관을 제외한 6개 공간 전관을 내줬다. 미술관 밖의 야외 데크, 로비, M2 1층과 2층, 블랙박스와 그라운드갤러리 전관에 걸쳐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이번 전시회는 리움 미술관과 파레노가 2년에 걸쳐 함께 준비했다. 전시 기간도 7월 7일까지로 무척 길다. 언론들은 하나같이 필립 파레노를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평소 리움을 알던 사람이라면 이번 전시에 큰 기대를 걸 법하다.

그런데 관람을 한 사람들이 SNS에 남긴 후기들을 보면 한결같다. “어렵다”, “해석이 되지 않는다”,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이전에도 아방가르드 예술의 충격적인 변화와 난해함은 보고 듣는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곤 했다. 현대 미술이나 현대 음악이 표현하는 날것의 불협화음도 대체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대한 고민을 던져주었다. 그래도 이제까지는 작품에 대한 설명을 접하면 “아, 그런 의미구나” 하는 이해는 가능했다. 그런데 파레노의 전시회는 또 다르다. 리움 미술관 홈페이지와 전시장에 걸려 있는 설명부터가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전시관에 들어가 작품들을 접하면 그런 어려움은 배가 될 수 있다.

‘굳이 해석하려고 애쓰지 말라’

그런 상황을 예상한 필자는 개막 첫날에 열린 ‘아티스트 토크’부터 가서 파레노의 얘기를 직접 들었다. 그 자리에서 파레노와 김성원 리움 미술관 부관장이 당부한 것은 ‘굳이 해석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냥 즐기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전시회를 찾은 관람객들이 막상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떻게든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안간힘을 쓰게 되는 습관이 있다. 필자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한 번을 봤는데 잘 모르겠다. 두 번을 보니 낯선 마음에서 벗어나 조금 친해지고 여유가 생긴다. 그래도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온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어 짦은 기간 동안 3차 관람까지 했다. 

필립 파레노 개인전 ‘보이스’(VOICES)가 오는 28일부터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홍철기 촬영/리움미술관 제공
필립 파레노 개인전 ‘보이스’(VOICES)가 오는 28일부터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홍철기 촬영/리움미술관 제공

<보이스>를 관람하는 데 정해진 순서는 없다. 다만 미술관 건물로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 야외 데크에 기계탑처럼 세워진 대형 신작 <막(膜)>부터 살펴보고 가는 것이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전시 전체를 이끄는 정보의 중심부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를 위해 파레노와 리움 미술관이 협업해서 만든 <막>은 미술관 내부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인공두뇌다. 수많은 줄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고 스피커에서는 외계인의 언어 같은 소리가 웅얼웅얼 나온다. <막>은 센서 기능을 갖고 있어서 기온, 습도, 풍량, 소음, 대기오염, 미세한 진동까지 지상의 모든 환경 요소를 수집해서 데이터를 미술관 내부로 보낸다. ‘아티스트 토크’ 시간에 파레노는 <막>이라는 작품에 대해 ‘지구에 뿌리를 내린 생명체’라고 했다.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세계를 느끼고 이해하려는 존재라는 얘기였다. 파레노는 이번 전시 전체를 유기적 생명체로 생각하는듯 했다.

내부로 전해진 이 데이터는 미술관 내부에 새롭게 탄생한 언어 <∂A>(델타 에이)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며 전시의 모든 요소를 조율한다. 인공지능에 의해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로 재탄생한 신작 <∂A>는 배우 배두나와의 협업을 통해 세상에 등장한 새로운 목소리다. 외계인의 언어를 연상시키는 웅얼거림으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언어 ‘∂A’를 습득하며, 결국 발화의 주체로 성장하는 작품이다. 이렇게 작품이 살아서 변화하고 성장하여 새로운 목소리가 창조된다는 것이 전시회 이름 <보이스>에 담긴 의미다. 

거대한 공연장이 된 미술관

리움 미술관은 거대한 공연장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전시물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거나 변화한다. ⓒ이현준 촬영/리움미술관 제공
리움 미술관은 거대한 공연장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전시물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거나 변화한다. ⓒ이현준 촬영/리움미술관 제공

리움 미술관은 거대한 공연장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전시물들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계속 움직이거나 변화한다. M2 전시관 1층에 들어서면 전시장 한 쪽 창가는 석양빛에 물들어 있고 곳곳에서 물고기 풍선들이 부유한다. 관객들은 물고기와 함께 어항 속에 들어가 버린 셈이 된다. 한 가운데 피아노 위에서는 주황색 눈이 내리는데 사람 없는 피아노는 자동으로 건반이 움직이며 연주된다. 전시장 곳곳에는 서서히 녹고 있는 눈사람, 전시장 창문 바깥에 놓인 크리스마스 트리, 한구석에 거대한 높이와 면적으로 잿빛 눈이 쌓여 있다. 반딧불이와 꽃이 나오는 투명 LED 화면 2개도 설치되어 있다.

영상 작품 〈세상 밖 어디든〉에서는 가상 세계에 머무는 일본 만화 여성 캐릭터 ‘안리’를 만나게 된다. 멜랑콜리한 캐릭터의 안리는 자신의 모호한 존재를 숙고하고 말하고 변화함으로써 탄생한다. 망가(일본 만화) 캐릭터가 목소리를 갖게 되면서 삶의 주체로 변화하고 탄생하는 과정을 듣고 보게 된다. 파레노와 동료 작가 피에르 위그는 안리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계약서를 작성함으로써 안리의 이미지는 그녀 자신에게만 속하게 됐다.

어두운 전시 공간인 블랙박스에서는 ‘마릴린’을 비롯한 3개의 영상이 연속으로 상영되고 있다. 화가 프란시스 고야가 머무르던 작은 시골집을 묘사한 ‘귀머거리의 집’은 실재와 눈속임 사이에서 강렬하고 초현실적인 상황을 연출한다. 이 곳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넓은 공간인 그라운드 갤러리가 나온다. 수많은 조명들이 깜빡거리고 여기저기 스피커들에서 소리가 나온다.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언어와 음악이 공간을 압도한다. 천장에는 말풍선을 떠올리는 투명풍선들이 가득차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춤추는 사람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모은다. 그는 춤을 추다가 관람객들과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전시장 안의 모든 작품들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며 관계하고 있다. 초현실적인 세계 같지만 가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들이다.  ⓒ이현준 촬영/리움미술관 제공
전시장 안의 모든 작품들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며 관계하고 있다. 초현실적인 세계 같지만 가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들이다.  ⓒ이현준 촬영/리움미술관 제공

전시장 안의 이런 모든 작품들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며 관계하고 있다. 초현실적인 세계 같지만 가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들이다. 작품들은 자기제어시스템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와 우연적인 상호작용에 따라 계속 변화하고 있다. 아날로그적 소재들 사이사이에 센서가 설치돼 있어 전시장 내·외부 상황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받아들이며 그에 맞춰 움직이고 소리들을 내는 것이다. 작가 파레노는 인공지능과 아날로그적 소재들을 이런 방식으로 연결시켜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치 생명체가 진화를 지속하듯이 전시장의 작품들도 계속 달라지며 진화한다.  

감각과 감성 통해 느끼는 전시

리움 미술관은 이번 전시가 난해하고 복잡하게 받아들여질 것을 감안해서인지 전시를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이해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이어가고 있다. 개막 첫날 ‘아티스트 토크’를 통해 필립 파레노의 작품 세계를 작가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4월 4일 문화예술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큐레이터 토크’에서는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부관장이 전시의 내용과 의미를 소개한다. 그리고 4월의 매주 토요일 오전에는 어린이 워크숍 프로그램 ‘현실 더 이상 안돼’를 진행한다. 여기에 참가한 어린이는 전시 공간을 누비며 다양한 창작 경험을 한다. 불빛이 있는 기차 공간에서 아이들이 퍼펫(인형극을 위한 인형)의 형태를 새롭게 인식하는 경험을 하고, 스크린 공간에서 는 빛의 거리와 몸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그림자 인형극을 직접 연출하고 실험한다.

전시를 한 눈에 건성으로 살피고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더라’거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반응으로 끝내고 말다가는 어쩌면 AI 시대의 새로운 획을 긋는 전시를 그냥 지나치게 될지 모른다. 백남준이라는 아방가르드가 젊은 시절에 그러했다. 그는 1961년 ‘귀로 듣는 전시’를 위해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이란 이름의 희한한 악보를 만들었다. 무대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부수는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예술이 아닌 기행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오브제가 없이도 관람객이 자유롭게 느낄 수 있는 예술을 백남준은 원했다. 그 시절 백남준은 “나는 청중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즐기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렇다면 필립 파레노는 AI 시대의 ‘영혼이 부유하는 아방가르드’일지 모르겠다. 그는 이번 전시가 시작되던 날, “몰라도, 이해하지 못해도 전시회에 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아름답다”고 청중들에게 말했다. “나는 관객에게 감상 순서나 보는 방법을 설명할 마음이 없다. 그러니 관객들도 원하는 만큼 전시장을 떠돌고 놀다가 가면 된다. 그게 몇 달간 존재하는 내 세상을 즐기는 방법이다.” 논리적 해석 보다는 그냥 감각과 감성을 통해 느끼면 되는 전시회다. 아직 기간이 넉넉하니 AI 시대의 이 새로운 전시를 경험해 보시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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