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지구의 모든 생명을 위해 저항한 여성

페트라 켈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여성 지도자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경력이 빈약할 수도 있고 더군다나 복잡했던 사생활은 정숙과 도덕적인 금욕주의를 요구하는 우리네 정서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유럽의 통합운동, 핵 폐기장 반대운동, 특히 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의 장을 여는 녹색당의 설립 과정에서 보여준 열정과 리더십은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을 구하는 싸움의 선봉에 섰던 여성’으로서 강한 이미지를 던져준다.

1947년 11월 29일 독일 남부 바이에른 지방에서 태어난 켈리는 외할머니의 영향 속에서 자랐으며 12세 때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한다.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 국제학부에서 정치학과 국제정치를 전공했으며 그 후에는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정치학과 유럽통합을 연구했다. 학업을 계속하면서 유럽연구소, 유럽공동체 등에서 활동했으며 유럽의 여성운동, 평화운동, 반핵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페트라 켈리의 이러한 국제적인 감각은 독일의 사회운동과 녹색당의 창립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켈리는 83년 독일 연방의회에 진출한 녹색당 의원 27인 중 한 명이었으며 세 명의 당대변인(당시 녹색당에는 당대표가 없이 세 명의 공동대변인만을 선출했기 때문에 당대표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당시의 남성 위주의 독일 사회, 독일 관료사회에 대한 저항감을 녹색당에 그대로 투영해 녹색당의 성평등한 정강 수립이나 기조 수립을 이끌었다.

그러나 85년 총선에서 녹색당의 순환제 원칙에 저항하여 의원직을 유지함으로써 결국은 녹색당과 결별하게 되었고, 92년 인생의 동반자였던 게르트 바스티안에 의해 사망하게 된다.(게르트 바스티안과 동반 자살한 모습으로 발견됐으며 바스티안이 켈리를 쏘아 죽인 후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5세라는 길지 않은 인생을 살다 갔지만 고정관념과 기성 정치에 저항한 운동가로서, 정치인으로서 켈리의 발자국은 깊게 남아 있다.

켈리 리더십의 초점은 설득과 네트워킹에 있었다. 독일의 평화운동을 기반으로 녹색당을 준비하면서 그 당시 유럽의 유명한 예술가였던 요셉 보이스나 하인리히 뵐, 루디 두치케 등을 설득하여 동참시켰으며 다양한 시민사회의 세력들을 엮는 역할을 했다.

켈리의 연설은 대중을 감동시키고 설득하는 연설로 정평이 나 있었다. 평화운동과 평화행진이 전 독일로 퍼져나가고 유럽까지 영향을 미친 데는 페트라 켈리의 연설이 큰 역할을 했다.

켈리는 진심으로 자신을 누구의 리더가 아니라 수많은 시비꾼 중 하나로 생각했다.

80년 그는 녹색당의 창립과 함께 대변인으로 입후보할 때도 스스로를 유럽공동체의 시비꾼으로 소개했다. 켈리 자신에게 스스로에 대해 물었을 때 ‘직관적이고 집요하고 위험한 인물’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즉 페트라 켈리는 온몸을 던져 그가 원했던 평화롭고 남녀가 공존하는 사회를 정치의 장에서 이룩하고자 했으며 그 영향은 녹색당뿐만 아니라 독일의 다른 기성 정당에까지 미쳤으며 비폭력 평화운동의 신화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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