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하다 잡혀가고, 시위하다 잡혀가고…

 

교회여성연합회장 때 ‘평화군축을 위한 대회’에서 조 목사가 대회사를 하고 있다.(1990년)gabapentin generic for what http://lensbyluca.com/generic/for/what gabapentin generic for whatsumatriptan patch http://sumatriptannow.com/patch sumatriptan patch
교회여성연합회장 때 ‘평화군축을 위한 대회’에서 조 목사가 대회사를 하고 있다.(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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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조화순 목사가 목사이런가

함석헌 선생하고 내가

서울 종로5가에서 전철을 타고 가면

인천산업선교

그 어둑어둑 침침한 방에는

동일방직 쪼까니 노동자들 속에서

그 역시 한 노동자로 앉아 있었다.

똥바가지 뒤집어쓴

그 반독재의 동일방직사건

무더기로 잡혀간 사건

70년대의 투쟁 꼭대기

바람찬 사건

거기에 그는 염통을 뚫어 피를 품어대었다

어찌 조화순 목사가 목사이런가

세월이 갈수록 백발인데

아직도 동일방직 쪼까니

그 소프라노 그대로

영구히

영구히

이 나라의 시악씨일진저

죽어가는 김병곤

살려내는

기도의 시악씨일진저

아니 썩어문드러진

이 땅의

수많은 사내들에게

가장 두려운 시악씨일진저

아 조화순 목사

 

-'이 땅의 두려운 시악씨일진저'-

 

산업선교회 시절 인천지역 공장 관리자들을 교육하고 계도하기도 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 목사.
산업선교회 시절 인천지역 공장 관리자들을 교육하고 계도하기도 했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조 목사.
동일방직 사건을 계기로 조화순 목사는 군사정권이 주목하는 요주의 시찰 대상으로 떠올랐다. 1974년 5월 긴급조치 2호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된 것을 시작으로 감방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세월이 시작됐다. 강연하다 잡혀가고, 시위하다 잡혀가고, 배후 조종 혐의로 잡혀가고…. 나중에는 수사관들이 "또 당신이냐?"며 어이가 없어 할 정도였다.

개중에는 억울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자신과 전혀 무관한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몰린 일도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자초한 일이었다. "그때는 운동권 사람들이 (수사기관에) 잡혀갔다 하면 돈 대준 곳을 반드시 밝혀야만 했어요. 돈 댄 곳을 못 밝히면 이북에서 돈을 대준 게 돼 앉은 자리에서 그냥 빨갱이가 돼버리는 거죠. 그런데 고문하고 몰아붙이면 견딜 재간이 있나요? 그래서 미리미리 그 사람들하고 입을 맞췄어요. 돈은 무조건 조화순이 댄 거라고 하기로."

"제가 지금 그 얘길 정말로 하기 바라십니까?"

 장기표씨 변호하다 판사에게 으름장을 놓다

그러다 보니 때로 생면부지의 사람을 변호해야 하는 일도 생겼다. 장기표씨(현 새정치연대 대표)의 경우가 그랬다. 장기표씨는 전태일 분신 이후 충격을 받아 홀홀단신으로 현장에 위장취업한 뒤 노동운동을 벌이다 구속을 당한 상태였다. 연계된 조직이 없어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인 상황. 딱한 마음이 든 조 목사는 이번에도 배후 조종을 자임하고 나섰다. 문제는 재판 과정에서 벌어졌다.

증인석에 선 조 목사를 향해 주임판사가 심문을 하는데 장씨의 행적과 관련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위증이 탄로 날 순간, 조 목사 손에 땀이 배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그런 배짱이 솟아난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도 결연한 태도로 그는 판사를 향해 큰소리를 쳤다. "판사님, 제가 지금 그 얘길 정말로 하기를 바라십니까?" 마치 군사정권에 타격을 입힐 중대한 비밀정보를 폭로하려는 양, 당당하게 구는 그 앞에 되레 주춤한 것은 주임판사였다. 옆자리 배석판사들과 귀엣말을 나누고 난 주임판사는 "됐습니다" 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버렸다. 십년감수가 따로 없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면서 그는 '노동운동의 대모' '운동권의 대모'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하게 됐다. 김근태, 손학규, 장기표, 최영희 등 오늘날 사회 중추를 이루고 있는 운동권 출신들이 지금까지도 조 목사를 마음의 스승으로 따르는 데는 이런 과거가 깔려 있는 셈이다.

감방과 제 집의 경계가 없이 살던 조 목사에게도 80년 5월은 혹독한 시련의 시기였다. 5월17일 새벽 1시, 집을 급습한 남자 4명한테 끌려가며 조 목사는 전에 없이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그 전까지 숱하게 연행을 당하고 조사를 받은 결과 조 목사와 수사관들은 "출옥하면 데이트를 신청하겠다"며 농담 따먹기를 할 만큼 친밀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반적으로 살벌한 공포 분위기가 흘렀다.

나중에 알고 본 즉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된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조 목사 스스로도 찔리는 데가 있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차원에서 밝히자면 그 시기에 그는 인명진 목사, 이창복씨(전 국회의원)와 더불어 대대적인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곧 80년 5월22일을 D-데이 삼아 각각 인천과 영등포에서 노동자들을 봉기시키기로 사전 협의를 해둔 상태였던 것이다. 노동자 봉기를 준비했던 이유를 조 목사는 이렇게 밝힌다.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제거됐다는 소식을 감방에서 들은 때부터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건 민중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니까요. 80년 들어서도 갑갑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역시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을 뒤집으려면 노동자가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지요."

 

산업선교회의 노동자 평신도 사도직 훈련 및 노동운동 교육 모습. 맨 오른쪽이 조 목사.
산업선교회의 노동자 평신도 사도직 훈련 및 노동운동 교육 모습. 맨 오른쪽이 조 목사.
80년 5월 17일 새벽 신군부에 의해 수감

옆방 문익환 목사와의 날카로운 첫 키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5·22 거사 계획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덕분에 그는 75일 만에 그 지옥 같은 안기부 밀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서 벌어진 영화 같은 에피소드 하나. 당시 그의 옆방에서는 문익환 목사가 조사를 받고 있었다. 아니, 그때는 문 목사라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단지 고문당하며 지르는 비명 소리가 중성적이고 허스키한 것으로 미루어 문 목사일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풀려나던 날, 조 목사는 수사관에게 "옆방에 가 잠깐 인사만 하고 나가겠다"고 말했다. 수사관은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며 그의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복도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체하던 그는 갑자기 뒤돌아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마침 문 목사가 조사받던 방의 문이 슬며시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방 안에서 서성대던 문 목사를 발견한 조 목사는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목사님, 죄송해요. 젊은 내가 먼저 나가게 됐어요." 그러자 문 목사 또한 너무도 반가운 얼굴로 얼른 다가와 조 목사를 끌어안았다. "조 목사, 걱정 말고 나가요. 잘됐어!" 하면서 대뜸 입도 쪽 맞췄다. 조 목사는 지금도 그것이 '내 생애 최초의 키스'라며 농담을 던지곤 한다.

안기부에서 풀려난 뒤 살벌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고군분투했다. 살 떨리게 두려운 광주의 기억 아래 모두가 숨을 죽인 상황이었다. 운동권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광주를 알리고 삼청교육대의 참상을 폭로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그 앞에서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답답한 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울부짖었다. "당신들 말이지, 사람 잡아 죽이고 짓밟는데 이러구 겁만 먹고 있을 거야? 그럴 거면 남자들 ○○ 다 떼어버려!"

침묵하는 남성들에게 그는 어쩌면 늘 부담스러운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훗날 고은 시인은 이런 조 목사를 일러 '두려운 시악씨'라고 노래했다(왼쪽). 

17년간의 도시산업선교 뒤로 하고 농촌선교로

'빨갱이 여자 목사' 적대감을 친화력으로 극복

 

그렇게 군사정권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던 84년 그는 느닷없이 존재 '이전'을 감행한다. 17년간 몸담았던 도시산업선교회를 떠나 교회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 것. 모두가 의아해하며 만류했지만 그의 마음은 확고했다.

"운동을 계속하다 보니 회의가 들었습니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스스로 떠들어왔지만, 과연 그럴까? 민초(民草)들이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이 과연 바뀔 수 있을까?' 하는 회의였지요."

생각한 것은 곧 행동에 옮기고야 마는 그는 결국 84년 1월14일 경기도 시흥 달월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달월교회는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두번째 목사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근 20년 만에 담임목사로 돌아온 그를 기억하는 교인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교인들은 그를 대놓고 적대시했다. 여자 목사인 데다, '빨갱이 목사'로 소문난 그였다. 그럴수록 조 목사는 타고난 친화력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했다. 의도적인 접근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그 시절에는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주름진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나더라고 조 목사는 말한다.

평생을 농사꾼으로 늙어 까맣게 탄 그네들의 얼굴에서, 마디 굵은 그네들의 손가락에서 '살아있는 하나님'을 느꼈다는 것이다. 조 목사는 동네 주민 또한 교인과 똑같이 대했다. 본래부터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그였다. "교회 벽돌 속에만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맹세코 단 한번도 없다"고 조 목사는 말한다.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웃으며 손부터 마주잡고 동네 경조사에 빠지는 일 없이 참여하는 이 외향적인 여자 목사에게 동네 사람들은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하얗게 센 머리 덕에 동네 할아버지들을 덥석덥석 껴안아도 오해 살 일 없는 것이 조 목사의 강점이라면 강점이었다. 사람들의 마음이 풀리면서 교인들의 숫자도 부쩍부쩍 늘어갔다. 덕분에 감리교단에 이런 말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남자 교인 없는 교회에는 조화순 목사를 급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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