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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희/한국여성민우회 생활협동조합 운영위원

이제 4월은 생명이 속삭거리는 정겨운 봄의 이미지에서 바겐세일로

법석대는 쇼핑센터의 이미지로 바뀔 것 같다.

올해는 모든 백화점이 4월 2일경부터 일제히 바겐세일에 들어갔고,

그 기간이 길기도 해서 거의 한달 내내 계속된데다가, 고급 외제승

용차 경품이며 패션쇼로 최대한 흥분상태를 지속시켰다. 그리고 이

번 세일은 대부분의 쇼핑센터가 흡족한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작년

말부터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한 소비회복세가 올들어 대단한 속도로

증가해 백화점매출이 IMF 이전 수준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 변화를

우리사회는 희망적 조짐으로 받아들이며 한편 안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작년 이맘때 우리는 어떠했나. 잡작스럽게 온 IMF체제로

작년 4월은 세계를 놀라게 한 금모으기 운동과 소비절약운동이 전국

을 뒤덮은 때 아닌가?

입달린 사람은 누구나 경제위기의 원인이 정경유착, 기업의 방만한

경영과 함께 국민모두의 과소비라고 말했고 국가, 기업, 국민 모두가

다 거품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 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

는 알짜 서민들까지 덩달아 자아비판을 하기도 했다. 온나라가 소비

절약의 결의를 다지고 주부들의 재활용품 수거운동이 각종 매스컴에

서 다뤄지고 구두쇠 경진대회까지 열려 전국의 구두쇠들이 발굴되고

치하되어 실로 비인간적이고 비정상적이기까지 한 한심한 구두쇠들

이 왕따의 처지에서 선각자로 대우 받기도 했다.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IMF위기가 환경친화적 생활양식을 확산

하게 되는 기회, 나아가 우리사회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이는 소비절약운동이 경제가 회

복될 때까지의 소비유보적 운동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사회를 향한

대안적 생활양식운동으로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환경단

체들이 이런 관점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전개했고 올해까지 이어지는

활동도 많다. 그러나 작년 상반기 이후 전개된 상황은 이러한 녹색

의 가치가 대량생산, 대량소비가 구조화된 경제체제에서 관철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있다. 이미 작년 상반기

부터 소비절약운동, 환경친화적 생활양식운동의 위험성이 경제일각

에서 지적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소비를 줄이자에서 똑똑

한 소비를 하자였으며 그래도 소비가 늘지 않자 하반기부터는 주택

건설활성화대책, 소비자금융정책 등 강한 소비부양책들이 쏟아졌다.

지난 겨울부터 뚜렷한 소비회복 조짐이 나타나고 이제 속도감 있게

상승하며 소비를 IMF 이전 수준으로 되돌려 놓았다. 이 과정에서

소비는 소비유죄에서 똑똑한 소비를 거쳐 당당한 소비로 변했다.

주가가 폭등하고 경제성장률도 높아져 애초 3.2% 전망했던 것이

4.3% 정도로 높아질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제 IMF체제를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냐는 입빠른 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한 편에선

실업자수가 2백만에 육박하고 노동자 실질소득이 12% 감소, 중산층

붕괴 등 극심한 양극화현상으로 개선 전망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

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IMF이전에는 자신이 중산층이

었으나 지금은 하류층이라 대답한 사람이 19.7%에 달했다.

한국은행조사에서는 계속해서 소비를 더 줄일 수밖에 없다는 사람

이 34%였다. 따라서 요즈음 소비회복의 특징은 소위 있는 사람들

중심의 소비라는 점이다. 현대자동차는 내수시장이 70.6% 증가했고

가전제품의 경우 고가인 LG의 완전평면 TV가 80%의 매출신장을

이루었다. 위스키 출고량이 29% 증가했고 고급외제차의 경우 작년

밴츠 판매 대수가 1백대 정도였는데 올해는 1/4분기에 이미 55대가

팔려 나갔다. 이러한 ‘있는 자들의 소비’를 보는 시각은 어떠한

가? 작년 초 같으면 이들은 집중 비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뭇 다르다. 정부나 기업은 물론 실업에 처해 있는 대부분

의 가난한 사람들조차 이들의 소비를 믿음직스러워하게 된 것이다.

경기가 회복될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다시 일할 수 있게 될 것인

가? 수입이 좀 늘게 될 것인가? 나도 저 대열에 끼게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소비에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반환경적 과잉소

비와 이를 전제로 하는 대량생산을 문제 삼기에는 없는 자들의 처지

는 너무나 열악하다. 자국을 파괴하는 선진국의 기업과 소비자들에

게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있는 제3세계 민중들과 다를 바 없는 상황

이다. 있는 자들의 생산과 소비가 지구를 파멸로 끌고가고 분배를

왜곡시켜도 당장 그들의 생산과 소비에 가난한 자들의 밥줄이 달려

있는 것이다. 소비가 미덕인 사회를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환경단체의 단순하고 지속가능한 소비생활양식운동은

어쩌면 공허한 외침일 수 있다.

작년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소비에 대한 담론의 귀결은 ‘없는 자는

환경친화적 소비로, 있는자에게는 당당한 소비’로 낙착된 것은 아

닌가? 그리고 이것은 구조조정, 정리해고 등으로 바닥으로 밀려난

가난한 사람들이 저항감없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빈곤한

삶을 받아들이려 하는 기제로 작용한 것은 아닌가. 아! 이렇게 거듭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제발 지나친 것이였다면 좋겠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경제의 기본구조를 문제

삼지 않는 소박한 차원의 지속가능한 소비생활양식운동, 소비절약운

동은 좀더 진지한 운동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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