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해질녘 찾아간 그곳에서는 수업이 한창이었다. 대안대학인 풀뿌리사회지기학교 수업으로 이 학교의 학교지기이자 수업의 ‘가르칠이’인 이성민 선생이 ‘배울이’들과 배움을 나누고 있었다. ‘상호강독2’라는 이 수업은 배울이들이 스스로 주제를 골라 한 주에 한 권씩 관련 책을 읽고 토론하면서 진행된다. 8명이 수강하는 이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이성민씨는 매주 9권의 책을 읽고 각 배울이들에게 질문과 논평을 한다. 주제는 다양하다. 공간, 마르크시즘, 철학 일반, 아웃사이더, 페미니즘까지.
수업이 끝날 때쯤 또 한 명의 체화당 사람인 정혜성씨가 카페로 들어섰다. 체화당 운영위원으로 활동했던 정혜성씨는 지금 전국녹색가게운동협의회 매장운영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대안 문화 공간을 표방하며 세워진 체화당은 거대한 욕망이 만들어지고 배설되는 신촌에서 작은 해방구로 남아 있었다. 2001년 이신행 연세대 명예교수가 자신의 집을 개조해 카페 체화당을 만들었고, 신촌의 지역주민과 대학생들이 각종 공연과 세미나를 진행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대안’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체화당은 2005년에 설립된 대안대학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의 모태가 되기도 했다. 지역사회 일꾼을 길러낸다는 취지의 풀뿌리사회지기학교는 기존의 대학교육을 비판하면서 세워진 만큼 폭넓은 소양과 전문적인 현장 기술 모두에 주력하고 있다. 2년10개월 과정의 수업은 2년(6학기)은 교실 수업으로, 10개월은 현장 수업으로 이루어진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가르칠이가 되어 배울이와 일대일 멘토링을 통해 현장 경험을 충분히 전수한다.
주류에서 벗어나 ‘다른’ 것을 꿈꾸고 실천하는 공간에서 배우고 자란 이들의 삶은 체화당이라는 공간의 꿈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체화당에서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 살게 된 계기”
“체화당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저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 따라 카페에 놀러왔다가 만나게 된 사람들이 결국 제가 이렇게 살게 된 계기가 됐어요.”
올해 서른다섯 살의 비혼 여성 정혜성씨는 귀촌을 준비 중이다. 체화당에서 인연을 맺은 세 명의 싱글 여성과 함께 생업을 정리하고 전남 해남으로 떠날 예정이다. 1, 2년 정도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서울에서는 바빠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계획이다. 아파트에 살면서 참아야 했던 피아노 연주나, 바느질에 빠져볼 생각이다.
서강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정씨는 방송국에서 작가로 일하기도 했지만 오래 하지 못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가 종교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는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사람을 직접 만나는 현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녹색가게에 이르게 됐다. 이 과정에서 정씨는 체화당에서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닮은 삶을 꾸려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는 사람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사람 자체가 좋은 거잖아요.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의 활동도 좋았지만 ‘대화’보다는 직접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녹색가게로 왔습니다.”
이성민씨는 대안대학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의 학교지기다. 체화당 건물 위층에 아내와 6살 난 아들과 함께 살림을 꾸리면서 학교의 전반적인 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연세대에서 정치외교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이씨는 타고난 균형감각이 오늘의 삶을 선택하게 했다고 한다.
“저에게 균형감각이라는 것은 삶의 원리 같은 것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제일 잘나가는 회사의 아이스크림은 안 사먹었어요. 1등은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어머니께서 ‘집안 식구들이 다 잘살아야 나도 잘산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는데 사회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자리에 다 잘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빈곤이나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 같아요.”
지난 봄에는 가족과 함께 인도로 떠나 3개월간 지내다 왔다. 인도 남부에 위치한 오르빌 공동체에서 물질적인 생활습관에 젖은 자신을 정화하고 싶었다. 오르빌은 1960년대 말 인종과 종교를 초월해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지향하며 세워진 곳이다.
“그곳에서는 전공이 필요없어요. 제가 사회학을 전공했지만 오르빌에서는 전기오토바이 회사에서 일했습니다. 오토바이를 만드는 기술은 없지만 전기 오토바이에 대해 인터넷으로 조사하고 홍보하는 일은 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굉장히 더운 지역이라 몇 시간만 일하고 대부분 사색하고 쉴 수 있습니다. 아내랑 아들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고요.”
정혜성씨는 해남으로 내려가는 준비를 하면서 아직 부모님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 진정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찾고 있지만 그런 삶의 방식이 부모님께는 못내 죄송할 때가 많다. 이성민씨도 이번 추석에 아버지와 돈벌이 때문에 실랑이를 했다고 한다. 이씨는 “돈을 위해 일할 때는 즐겁지 않으면서 바쁘기만 했지만, 마음의 중심을 잡고 생활할 때는 오히려 돈 쓸 일이 별로 없다”며 생활철학을 풀어놓았다.
명예, 돈, 성공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들. 이신행 교수가 체화당 사람들에게 늘 얘기했다는 “주어진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삶의 철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 뚝심 있는 이들의 삶이 성찰 없는 사회에 작은 푯대가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