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나눔으로 공동체 가치 복원해야”
2010년 전 재산 기증해 개도국 공무원 지원

 

이순자 교수의 식탁은 우아하고 품격이 넘치지만 문턱이 높지 않았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순자 교수의 식탁은 우아하고 품격이 넘치지만 문턱이 높지 않았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문턱 낮은 식탁

생각보다 소박했다. ‘요리책’(저자는 요리책이 아니라고 했다)의 저자이기에 인터뷰 촬영을 위해 그가 차려낼 밥상이 꽤나 화려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메인 요리인 연어와 닭고기 찜은 물론 훌륭했지만 함께 놓인 우거지 나물과 멸치볶음이 더 입에 감겼다. 들깨 향이 가득한 우거지 나물에 자꾸만 손이 가는 것은 하루 세 끼 ‘바깥 밥’을 먹어야 하는 기자에게 그것이 너무나 그리운 ‘집 밥’의 향기였기 때문이리라.

모차렐라 치즈와 생토마토를 층층이 쌓아 직접 만든 발사믹 소스를 뿌린 샐러드로 시작해 주 요리를 거쳐 갓 내린 커피와 조각 케이크로 마무리한 나름 코스 요리 상차림이었지만 마늘쫑 장아찌와 흰 쌀밥도 함께 놓여 있는, 틀에 끼워 맞춰야 하는 격식 따위는 필요치 않은 식탁이었다. 요리는 우아했고 호스트는 품격이 넘쳤지만 그의 식탁은 문턱이 높지 않았다.

이 집 식탁의 문턱이 낮은 것은 ‘레시피도 없이’ 격식에서 자유로운 요리 때문만은 아니다. 손님 접시에 직접 음식을 덜어주며 식사 시간 내내 웃음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집주인의 소탈함 때문이기도 했다. 인터뷰를 핑계 삼아 호사를 누린 기자가 요리와 수고에 대한 감사를 건네자 집주인은 거듭 ‘일상적인 일’이라며 ‘수고가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그저 식구들 먹는 밥상에 수저 한 벌 더 놓아 손님을 대접했다는 주인장의 편안한 마음이 이 집의 식객이 그리도 많은 이유인 듯했다.

 

이 교수는 최근 펴낸 책 따뜻한 밥상을 통해 평생 식탁 나눔으로 실천해 온 사람들과의 소통과 공감, 공동체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 교수는 최근 펴낸 책 '따뜻한 밥상'을 통해 평생 식탁 나눔으로 실천해 온 사람들과의 소통과 공감, 공동체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최근 ‘따뜻한 밥상’(청강문화산업대학교 출판부)이라는 책을 펴낸 이순자(76) 숙명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석사를, 연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인 그가 느지막이 요리책을 내놨다. 그의 말대로 자전적 이야기 책도, 요리책도 아니라는 이 책에서 그는 평생 식탁 나눔을 통해 실천해 온 사람들과의 소통과 공감, 공동체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먹고 산다’라고 하잖아요. 그 말이 우리나라밖에 없더라고요. 다른 나라 말에서는 찾아보질 못했어요. 우리가 하도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먹어야 했던 절실함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잘살게 되었어도 우리는 여전히 ‘뭐 먹고 사냐’는 얘기를 하잖아요. 먹는 일, 음식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중요한 일에 정성을 들이는 것이 곧 잘 사는 일입니다.”

그는 인생에서 ‘먹는 것’과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요리를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래서 그의 요리에는 ‘레시피’가 없다. 그저 구하기 쉽고 값싼 식재료를 간단한 조리 과정을 거쳐 먹음직스럽게 차려내는 것이 그의 비법이다. 6남매의 맏딸로, 시어머니까지 모시는 워킹맘으로, 고위 공무원이었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손님 초대도 거뜬히 감당하며 살았던 그의 요리가 까다로울 여유는 없었을 듯했다.

 

“애들은 으레 떠나는 것”

이 교수의 남편은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으로 작고한 김재익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서울대 외교학과 56학번인 동갑내기 남편과는 캠퍼스 커플이다. 이순자·김재익 커플을 모르면 가짜 학생이라는 말이 캠퍼스에 나돌 만큼 그 시절치고는 ‘요란한’ 연애를 했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인 1962년에 결혼한 두 사람은 첫째 아들과 함께 1966년 하와이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후 남편이 스탠퍼드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는 동안 이 교수는 그 대학 도서관에 사서로 취직해 가계를 꾸려나갔다.

“유학 시절 우리가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있는 유학생 신분이라 혜택을 많이 받았어요. 그때 돈으로 학비가 한 달에 120달러 정도였는데 우리는 12달러만 냈어요. 너무 고맙고 미안하더라고요.”

젊은 시절 타국에서 받았던 도움을 되갚기 위해 이 교수는 2010년 남편의 이름으로 모교인 서울대에 전 재산을 기부해 ‘김재익 펠로우십’을 발족했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이 교수 사후에 기증하기로 했다. ‘나랏일’만 하다가 갑작스레 떠나버린 남편의 이름을 조금이라고 기억하도록 하고 싶은 바람이었다.

“우리처럼 가난하고 희망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면 남편이 좋아할 거란 생각을 했어요. 개발도상국 공무원들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공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몇 십 년 후에 김재익펠로우십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고위직에 올랐을 때 우리나라와 일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45세에 남편을 잃은 이 교수는 당시 “둘째가 너무 어리니까 내가 1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라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나니 둘째 아들이 대학을 졸업했다. “이제 안심이다” 생각하는 사이 얼떨결에 또 10년이 지나가고, 이제는 30년이 지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고 했다. 홀로 두 아들을 건사하며 30년을 보내고 나니 이제 3명의 손자까지 생겼다. 둘째 아들네가 서울 반포에 살고 있지만 함께 살진 않는다. “애들은 으레 떠나는 것”이라 외롭지 않다는 이 교수는 “너무너무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

“내 생활은 내가 하는 거지 남이 하는 게 아니잖아요. 남편이랑 같이 있을 때도 남편은 남편대로 생활이 있었고, 나는 나대로의 생활이 있을 만큼 독립적으로 사는 게 버릇이 됐어요. 자식들이 들어와 살겠다고 하면 내가 말려요.”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는 큰아들이 1년간 한국에서 지내게 됐을 때도 따로 거처를 마련할까 하다가 아들이 하숙비 낼 테니 받아달라고 해 지금 함께 지내고 있다. 시세보다 적게 받는다면서 월 100만원씩 하숙비도 받고 있다.

“(아들이) 수입이 없으면 몰라도 월급 받는데 생활은 자기가 해야죠. 내가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는데. 한번은 자기가 쓰는 화장실이 고장나니 ‘어머니 이건 제가 비용을 내야 하는 거죠?’라고 묻더라고요.(웃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요. 애들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죠. 오히려 내가 독립적으로 사는 걸 고맙게 생각해요.”

 

이 교수는 초대한 손님에게 직접 음식을 덜어주며 접대에 정성을 다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 교수는 초대한 손님에게 직접 음식을 덜어주며 접대에 정성을 다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가정이 와해되는 것은 ‘집밥’이 없기 때문

“이제 나이가 많아 해야 될 일도 별로 없고, 안 해야 될 일도 별로 없어 굉장히 자유롭다”는 이 교수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시간을 쏟고 있다. 7년째 한문을 공부 중인 그는 요즘은 양명학을 탐구 중이다. ‘바퀴 보시’도 그의 주요한 일과다. 주변에 나이 들어 운전을 포기한 이들을 위해 운전을 자처하는 것을 그는 ‘바퀴 보시’라고 했다. “불교에서 제일 상위의 보시가 무식한 사람을 가르쳐주는 것이고, 둘째가 배고픈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이라고 하거든요. 저는 기동력 없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해 주는 것을 ‘바퀴 보시’라고 지었어요. 바퀴 보시도 많이 해야 해요.”

또한 그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주변인들과의 식탁 나눔이다. ‘혼자 밥 먹는 날이 거의 없다’는 이 교수는 동생이나 동네 친구들을 불러다가 같이 밥을 먹고, 함께 요리를 하기도 한다. “식도락은 음식의 맛만이 아닌 어떤 분위기에서 누구와 함께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느냐의 총체적 기쁨을 뜻하는 것”이라는 그의 실천적 삶이다.

“가족이, 가정이 와해되는 것은 ‘집밥’이 없기 때문”이라는 그는 “밥 먹는 것 자체가 자기 몸을 위한 것이고, 같이 먹으면 즐거움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조금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어렵지 않게 집밥을 먹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도 남들 하는 거 다 하려고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문했다.

“나는 슈퍼우먼이 아니라 ‘보통 우먼’이었어요. 일하는 엄마들이 애들에게 잘 못해줘서 죄스럽다고 하는데 좋지 않은 생각이에요. 나는 남편을 잃었을 때 애들에게 ‘아버지 없어도 엄마가 다 해 줄게’ 이런 소리 안 했어요. 내가 희생한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애들에게 당당할 수 있어요. 애들 위해 재혼 안 한 게 아니에요. 우리 남편 반만이라도 되는 남자가 있었으면 나는 결혼했다, 없어서 못한 것이라고 애들에게 늘 얘기했어요.”

현대인들은 먹을 게 넘쳐나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지만 늘 ‘집밥’이 고프다. 조미료가 들어 있지 않은 건강식이기 때문이 아니라 밥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나누는 정에 목마르기 때문일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집밥’ 먹기를 피하기만 하는 젊은이들에게 ‘열린 마음’으로 ‘쉽게 생각하라’는 노 교수의 다독임이 더욱 살갑다.

 

*'따뜻한 밥상'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미래원과 청현문화재단이 기획한 '향기로운 책' 시리즈의 첫번째 권으로 여성 선배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의 가치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귀감이 될 수 있도록 기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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