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이 추진한 여성정책

첫 내각에 여성 장관 3명·여성 차관 임명

최초 여성 대사 발탁 등 과감한 기용 돋보여

여성발전기본법·성폭력처벌법 등 제정도

 

23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3일 서울광장에 마련된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민주화의 큰 별 김영삼 전 대통령이 11월 22일 타계했다. 정치·사회 개혁에 앞장섰던 인물인 만큼 집권기(1993~1998)에 펼친 여성정책도 이전 대통령들과는 달리 과감했다. 고위직에 여성을 적극 기용하고, 현재 여성정책의 기틀이 된 여성발전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양적인 성장이 돋보였다. 하지만 정부의 여성정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정책 효과는 미흡했다는 상반된 평가도 공존한다.

김 전 대통령은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성이 존중되는 평등 사회의 실현’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여성 정치참여 확대, 가사노동 가치 인정, 고급 여성인력 양성 위한 투자 촉진, 고위 정책결정직에 여성 과감히 기용, 성폭력 예방·규제 위한 법률 제정 등 상당히 세부적인 약속으로 여성계의 기대감도 컸다.

‘변화와 개혁을 통한 신한국 창조’를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문민정부’의 조각 명단에는 황산성 환경처 장관, 박양실 보사부 장관, 권영자 정무2장관 등 3명의 여성 장관이 이름을 올렸다. 본격적인 여성 장관 시대를 연 것이다. 과감한 여성 기용을 약속한 정부로, 장관 24명 가운데 3명(12.5%)을 여성으로 임명한 것은 정책 실현 의지를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작한 단식으로 심신이 쇠약해지자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한 모습. 손명순 여사가 옆에서 간호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1983년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작한 단식으로 심신이 쇠약해지자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한 모습. 손명순 여사가 옆에서 간호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조각에 이은 첫 차관급 인사에서도 김정숙 민자당 부대변인을 정무2장관실 차관으로 임명, 사상 첫 여성 차관이 탄생했다. 여성 이슈를 다루던 정무2장관실은 1988년 출범 이후 줄곧 여성이 장관 자리에 올랐으나, 차관은 늘 남성이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동안의 관례를 깨고 김정숙 차관을 비롯해 김영순·김정자·정옥순·신태희 등 여성을 차관에 임명했다. 첫 여성 차관에 올랐던 김정숙 현 세계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은 “김 전 대통령은 고위 정책결정직 여성을 많이 기용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발언할 정도로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여성들을 적극 기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분”이라며 “문민정부 5년은 다양한 법제도가 마련된 여성정책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라고 회고했다. 여성정책의 꽃을 피운 시기는 김대중 정부지만, 싹을 틔운 시기는 김영삼 정부라는 설명이다.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여성담당 비서관을 신설, 정옥순 민자당 여성국장을 발탁했으며, 96년에는 이인호 전 서울대 교수(현 KBS 이사장)를 핀란드 대사에 임명, 국내 처음으로 여성 대사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여성 발탁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부동산 투기 의혹을 받은 박양실 보사부 장관이 취임 10일 만에 물러났고 황산성 환경처 장관은 국회 답변 도중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는 이유로 언론과 남성 의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야 했다. 여성 장관들이 연이어 문책성 경질을 당하자 정부는 여성 장관을 임명하지 않는 수순을 밟았다. 남성 장관들의 문책성 경질 후에도 남성 장관은 계속 임명된 것과는 상반된다. 이에 따라 김 전 대통령 임기 중 임명된 장관 114명 중 여성 장관은 7명(6%)에 그쳤다.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여성신문
제14대 대통령을 지낸 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여성신문

김 전 대통령 집권 시기는 국내 여성정책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시기다. 95년 대통령 직속 기구인 세계화추진위원회가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10대 중점 과제로 정했고, 같은 해 여성정책 수립의 근간이 된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됐다. 여성발전기본법을 통해 여성정책에 관한 기본 계획을 5년마다 수립하면서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실천적인 제도적 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95년은 제4차 유엔(UN) 베이징세계여성대회가 열린 해다. 당시 정부부처 대표단과 NGO 대표 등 600여 명으로 구성된 한국 참가단을 이끈 것은 대통령 부인인 손명순 여사였다. 주민자치중앙회 총재인 이연숙 전 정무장관은 “한국의 보수 여성단체와 진보 여성단체가 처음으로 함께 만나서 일을 해봤던 때”라며 “영부인까지 가니 더 많이 알려지지 않겠나 해서 같이 가게 됐고 결국 법 제정까지 이끌어냈다”고 말한 바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베이징세계여성대회가 끝난 후 여성 사회참여를 위한 10대 과제를 발표했다. 탁아시설 확대, 고위직 공직자 채용목표제 실현, 공기업 여성 채용에 대한 인센티브 제공, 임산부 보호 비용의 사회적 부담 시행, 여성 고용을 위한 교육과 훈련의 확산, 여성발전기본법 제정 등이 과제에 포함됐다.

대통령 공약 사항이었던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은 94년 이뤄졌으며, 남녀고용평등법도 95년 여성의 신체조건 등을 채용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 금지, 육아휴직 대상 확대 등을 내용으로 개정됐다. 여성에게 입학을 허용하지 않던 공군사관학교가 97년부터 입학 정원의 10% 이상, 육군사관학교가 2000년 이내 입학 정원의 10% 이상을 여성으로 선발하기로 결정한 것도 이 시기다.

하지만 다양한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를 크게 기대하긴 어려웠다. 정부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 부족과 이를 집행할 총괄부서인 정무2장관실의 낮은 권한, 적은 예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97년 여성단체와 전문가들이 벌인 김영삼 정부의 여성정책 평가에선 보통에 훨씬 못 미치는 ‘D마이너스’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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