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김순희 초전 섬유·퀼트 박물관장

2000년 편물명장 1호로 지정

학비 마련 위해 57년 제일편물 설립

“바느질엔 삶의 지혜 오롯이 담겨”

덕혜옹주 의복 환수에 결정적 역할

 

김순희 초전 섬유·퀼트 박물관장은 “바느질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cialis coupon cialis coupon cialis couponcialis manufacturer coupon site cialis online coupon
김순희 초전 섬유·퀼트 박물관장은 “바느질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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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바느질 기법 가운데 ‘삼침’이라는 게 있어요. 세 번 잘 생각하고, 세 번 잘 참고, 3년 동안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는 의미예요.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나요?”

한국의 섬유예술을 해외에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쳐온 대한민국 편물명장 1호, 김순희(85) 초전 섬유·퀼트 박물관장의 말이다. 한 땀 한 땀 정성들인 바느질로 옷과 침구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바느질에는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철학도 오롯이 담겨 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인연을 맺은 바느질이었지만 그는 보자기의 아름다움에 빠져 60년 가까이 세계 곳곳을 누볐다. 그렇게 우리의 전통 조각보 300여 점과 세계 각국을 돌며 수집한 해외의 자수와 퀼트 작품 등 1800여 점을 모아 지난 1998년 남산 자락에 초전 섬유·퀼트 박물관을 세웠다. 그는 “사라져 가는 한국 전통 조각보 기법을 전승하고, 한국 섬유예술의 세계화를 위한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박물관 이름에 ‘누빔’이라는 우리말 대신 ‘퀼트’를 넣은 것도 이 때문이다. ‘초전(草田)’은 풀밭이란 뜻으로 김 관장의 아호이자, 그가 태어난 경북 의성의 지명이기도 하다.

이곳에선 김 관장이 만든 보자기 작품과 색동저고리를 비롯해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만들어진 퀼트 작품과 국내외 작가들의 현대 퀼트 작품, 세계 각국의 전통 옷을 입은 인형도 볼 수 있다. 소장된 작품들은 미국, 영국 등 해외 전시를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외국인에게 한국 섬유예술의 우수성을 알리는 역할도 톡톡히 한다. 미국 네브래스카대에 설립된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퀼트연구센터에 첫 국제 초청작으로 선정돼 한국의 작품들을 전시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덕혜옹주 복식 7점이 국내로 돌아오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3년만 하자고 시작한 일이 평생 업으로

박물관장치고는 김 관장의 이력이 의외다. 이화여대 사범대학을 나와 모교인 경기여고에서 2년간 교사 생활을 했다. 당시 학생들과 같이 며칠 밤을 고생해 편물 작품 전시회를 열려고 했지만, 전시회를 며칠 앞두고 도둑이 들어 전시품을 모두 도난당하기도 했다. 언니 둘과 오빠가 모두 외국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바느질과 인연을 맺었다. 1957년 친구에게 자본금 200만원을 빌려 충무로 한복판에 ‘제일편물’을 차리고 본격적인 편물 제품 제작과 판매를 시작했다. 하지만 바늘을 처음 잡은 것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관장은 어릴 적부터 바늘과 실, 헝겊과 함께 자랐다. 손수건을 만들고 미군의 양말 실을 풀어 새 양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김 관장은 “제일편물은 딱 3년만 할 생각이었다”고 했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가문의 체통이 있지, 장사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3년을 마무리하는 전시회는 그의 바느질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가장 큰 전환점이 됐다.

“어렵사리 신세계미술관을 빌려 그동안 만든 작품들을 전시했죠. 그런데 전시회를 찾은 경기여교 박은혜 교장선생님께서 니트로 짠 스포츠웨어를 보시더니 학교 체육복으로 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남색 바탕에 하늘색, 빨간색, 흰색으로 선이 들어간 스웨터 상의였어요. 그 옷이 체육복으로 지정되면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죠. 3년만 하면 유학비와 비행기표는 해결되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지금까지 왔네요.”

제일편물과 김순희라는 이름 석자는 점차 유명해졌다. 제일편물 스웨터를 입기 위해 몇 달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있는가 하면, 육영수 여사가 박근혜 대통령 등 자녀들을 입히기 위해 일 년에 몇 번씩 사람을 보낼 정도로 인기였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가 수그러들지 않자, 반대를 피하기 위해 ‘제일편물학원’이라는 이름으로 학원을 시작했다.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고 수입도 늘었지만 그에게는 학업에 대한 목마름이 남아 있었다. 1963년 떠난 일본 연수는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순간이었다. 그는 국제기능올림픽대회를 국내에 처음 알렸다. 1964년 일본인 동료들과 유럽으로 학습여행을 떠난 그는 스페인에서 ‘국제기능올림픽대회’를 처음 접했다. 당시 국내에선 기능올림픽대회의 존재도 알지 못하던 시기였다. 그는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기능올림픽대회를 밀어붙일 수 있도록 기초를 제공했다.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당시 학습여행에서 그가 코코샤넬을 만난 일화도 유명하다. 샤넬 패션쇼를 갔을 때,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 동료들 사이에서 홀로 한복을 입은 김 관장은 눈에 띄었다. 샤넬의 비서가 그에게 “샤넬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했고, 바로 패션쇼장 2층에 올라서자 샤넬은 김 관장에게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무슨 옷이냐? 그 브이넥은 뭐냐?”고 물었다. 샤넬이 말한 브이넥은 한복 저고리의 동정을 보고 한 말이었다. 그 후 50년이 흘러 한국에서 한복과 조각보, 오방색 등을 모티브로 한 샤넬 패션쇼가 열린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관장은 “실하고 바늘, 천은 전 세계 어딜 가나 공통적이에요.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모두 통하죠. 그렇다 보니 세계에서 우리의 섬유예술을 알리는 일이 그리 어렵진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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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방자 여사·덕혜옹주와의 인연

그때 만난 인연 중 한 명이 오누마 스나오(88) 문화복장학원 이사장이다. 문화복장학원은 일본 최초의 복장학원으로 다카다 겐조와 요지 야마모토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배출한 곳이다. 역사가 오래된 학교다 보니 문화복장학원 복식박물관에는 수많은 작품이 소장돼 있었다. 그 가운데 김 관장의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조선시대 황실 복식과 생활용품들이었다.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것들이었지만, 옷의 출처를 묻는 김 관장의 질문에 오누마 이사장은 “중요한 물건”이라는 말만 할 뿐, 구체적인 설명은 피하는 눈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옷들이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1912~1989)가 입었던 황실 복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 부부가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했던 소 다케유키 백작에게서 돌려받은 혼례품과 복식 등을 문화복장학원에 기증했던 것이다. 김 관장은 이 사실을 알고 바로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를 떠올렸다고 했다.

김 관장은 당시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비인 이방자(1901~1989) 여사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당시 이방자 여사는 창덕궁 내 낙선재에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칠보를 계승해 많은 이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다. 이방자 여사를 자주 찾아뵙던 김 관장은 낙선재 뒤뜰에 나갔다가 우연히 덕혜옹주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그가 본 덕혜옹주는 평상에 다리를 뻗고 비스듬히 앉아 아름답게 핀 철쭉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낮에 낙선재 뒤뜰에서 햇볕을 쐬는 것이 덕혜옹주에게는 최고의 외출이라고 들었어요. 이방자 여사께선 덕혜옹주의 마지막을 당신이 돌봐줘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선물 받은 최고급 보료를 덕혜옹주께 드리고는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김 관장은 이방자 여사를 도와 1985년 『조선왕조 궁중의상』을 펴내는 일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덕혜옹주 의복 환수에 나섰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굴곡 많은 삶을 산 두 사람의 넋을 기리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문화복장학원 복식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면서 자신의 작품들을 기증하는가 하면, 교분을 쌓으며 오누마 이사장을 꾸준히 설득했다. 특히 한국에서 덕혜옹주 유품 전시회 개최를 제의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복식박물관 큐레이터는 “한국으로 가져간 후 되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 관장은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해 2012년 국내에서 첫 덕혜옹주 의복 전시를 열었다. 김 관장은 일본에 있는 덕혜옹주 복장을 국내로 들여와 전시한 부분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본격적으로 의복 환수를 진행하면서도 여러 번 높은 벽에 부딪쳤지만, 김 관장은 “이방자 여사와 덕혜옹주를 생각하며 비행기를 탔다”고 말했다. 그렇게 덕혜옹주가 아기 때 입었던 초록색 당의, 붉은색 스란치마, 진분홍 저고리, 단속곳, 풍차바지 등 의복 7점이 90년 만에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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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한국의 섬유예술 저변 확대에 기여하고파

그는 85세지만 전시회를 열고 체험학습을 지도하며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올해만 4000여 명의 아이들이 박물관에서 스스로 바느질을 해 주머니를 만드는 체험을 했다. 하지만 정부의 제도적 지원 없이 적자를 감수하며 박물관을 유지하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일이 쉽지 않다.

“박물관을 유지 관리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다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적자를 감수하면서 지금까지 멈추지 않는 까닭은 우리 섬유예술의 가치와 철학을 후손들에게도 널리 알리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죠. 바느질과 편물에 사람들의 관심이 준 게 참 안타까워요.”

김 관장은 올해 일선에서 물러날 생각이라고 했다. 박물관 살림을 도맡고 있는 며느리 정은희씨와 세 딸이 김 관장의 뒤를 이어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는 늘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을 가슴속 깊이 담고 있다. “실이 엉키면 끊지 말고 풀어야 해.” 바느질을 할 때도,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도 어머니의 말은 그의 인생 나침반이었다. 김 관장은 그의 며느리와 딸들도 역경이 닥칠 때마다 이 말을 기억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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