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발인이 엄수된 2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과 관계자들이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발인이 엄수된 28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유가족과 관계자들이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죽음 앞에 놓여진 “국내 주요 기업 대표로는 처음으로 여성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CEO”라는 여성신문의 평가나 “‘훌륭한 기업가’였다”는 시사인의 평가 앞에서 탈정치적인 시선의 한계를 느낀다.

촛불 이후 새로운 변화의 물결 속에서 터져 나온 미투의 본질은 ‘권력형 성범죄’를 향한 고발이었다. 성범죄를 양산하고, 용인하고, 은폐해왔던 권력의 본질이 무엇인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의 영역에서 빼앗긴 생사여탈권이 권력이 되었으며, 생사여탈권을 쥔 자가 성폭력의 가해자가 되었고, 그를 손쉽게 덮을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이들은 정치, 문화, 사법, 행정, 언론 등 어느 영역이든 자본을 매개로 결탁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과 불법세습은 ‘여성인재 중용’이나 ‘훌륭한 기업가로서의 면모’와 동등한 무게로 등치시킬 수 있는 과오가 아니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과 불법세습은 국가와 사회를 자본권력으로 포섭한 결과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을 무력화 시킨 것이다. 그 결과 헌법상 권리와 법적 보호망 밖으로 밀려난 많은 노동자와 여성은 일상과 생명을 잃었고, 기술을 탈취당하고 불공정 거래관계에 놓인 중소기업 사장들의 삶은 고통에 놓였다. 끝내 목소리 내기를 포기하지 못한 착취당하고 수탈당한 이들은 적극적으로 헌법파괴자, 범죄자 삼성을 옹호하는 언론과 국가기관에 대항해 더 지난하게 싸워야만 했고 지금도 여전히 마땅한 권리를 인정받아 억울함을 씻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싸우고 있다.

자본을 매개로 한 가부장적 성폭력 체계 앞에 노동자, 여성, 자연은 다르고도 또 같은 방식으로 수도 없이 짓밟히며 착취당하고 수탈당한다. 자연이 수탈당한 결과 우리는 기후위기를 맞고 있고, 여성과 노동자의 착취와 수탈의 고리를 끊고 인간다운 일상을 살고 싶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거대한 반격과 무시를 동시에 감당하고 있는 처지이다. 그리고 이 체계의 정점에 삼성이 있고, 이건희 전 회장이 있었다.

노동자를 자기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조직하고 자기 노동환경을 주장할 권리를 가진 주체로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않던 이 전 회장이 여성의 권리는 인정했을까. 생전에 성매매 영상으로 파란을 일으켰던 장본인이 이 전 회장이었으며, 여성 또한 본인의 쾌락을 위해 자신의 선택대로 구매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했다.

모든 인간은 전 생애를 걸쳐 잘한 것만 있거나 못한 것만 있을 수 없다. 악을 위해 사는 사람은 없으며, 자신이 믿는 신념과 대개 맞는 것이라 판단하고 정립한 개념에 따라 사람은 행동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판단할 수 있다. 이 전 회장의 전 삶을 관통한 신념과 행동이 한국 사회 공공선에, 민주주의에, 페미니즘에 기여하는 것이었는지.

탈정치화의 시작은 전인적이고 통합적인 관점에 따른 도덕적 판단을 포기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한 사람의 공과 과, 말과 행동을 해체하고 모든 것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으로는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없다. 자본과 가부장권력 앞에 굴복하지 않고 민주주의의 확대와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언론이라 기대한 여성신문과 시사인의 기사에 실망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 가부장 성폭력 체계의 한국사회를 견인한 그 정점에 있던 자의 죽음 앞에 정치적 판단을 저버리고 공을 병렬한 데 있다.

이 전 회장과 삼성이 한국사회에 심어놓은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노동자와 여성이 인간다운 삶을 사는 사회를 열 수는 없다. 삼성이 기여한 한국 사회 자본주의 가부장적 성폭력 체계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내리고, 기존의 체계를 전면 부정하고 전복하는 새로운 정치를 만들 때 비로소 노동자와 여성이 지금, 그리고 기후위기가 가속화되는 시대에 인간답게 사는 사회가 가능할 것이다. 

안소정 경기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br>
안소정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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