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우리말 쓰기] ⑪ 히말라야도 아닌데 궁궐 트레킹?
[쉬운 우리말 쓰기] ⑪ 히말라야도 아닌데 궁궐 트레킹?
  • 곽민정 방송사 보도본부 어문위원
  • 승인 2022.08.12 08:42
  • 수정 2022-08-12 15: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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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창경궁과 종묘를 90년 만에 다시 연결하는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사업'을 완료했다.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시켰던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에 축구장보다 넓은 녹지를 만들어 끊어졌던 녹지축을 이었다. 사진=서울시 제공
서울시가 창경궁과 종묘를 90년 만에 다시 연결하는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사업'을 완료했다. 창경궁과 종묘를 단절시켰던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에 축구장보다 넓은 녹지를 만들어 끊어졌던 녹지축을 이었다. 사진=서울시 제공

얼마 전 반가운 소식이 있었지요. 일제강점기 때 끊어졌던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사잇길이 90년 만에 복원되어 시민에게 개방됐습니다. 창경궁과 종묘는 원래 담장을 사이에 두고 녹지로 연결돼 있었는데요, 일제가 1932년 중간에 도로를 내며 나뉘게 됐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궁궐의 담장은 물론 임금이 종묘를 방문할 때 이용했던 북신문(北神門) 등도 사라졌다고 하고요. 2011년 시작된 복원공사는 장장 11년이 걸려 올해 마무리되었는데요,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던 도로는 지하화됐고, 도로가 있던 자리엔 숲이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북신문과 503m에 달하는 궁궐 담장도 복원됐다지요. 각 언론의 보도사진을 보니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숲이 눈이 시원할 정도로 푸르렀습니다.

“궁궐 트레킹 즐긴다”는 언론들

서울시는 이번 복원을 기념해 전문 해설사와 함께하는 해설 관광도 운영한다고 합니다. 창경궁과 종묘 일대 2.6km를 산책하는 프로그램인데요, 언론들은 앞다퉈 이 내용을 기사화해 시민들에게 알렸습니다. 모두 대동소이한 사진과 함께 내용도 비슷했는데요, 주요 언론들이 내건 “궁궐 트레킹 즐긴다” “궁궐 트레킹 가볼까” 제목에 불편한 눈길이 머물더군요. ‘궁궐’과 ‘트레킹’의 언어 조합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트레킹은 5000m 이하의 산을 걷는 것

국내에서 ‘트레킹’이란 말은 언제부터 빈번하게 사용되었을까요? 얼핏 산티아고 순례길이 일반에 알려지고, 제주 올레길 1코스가 생긴 2007년쯤이 아닐까 가늠해보았는데요, 찾아보니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1990년에 이미 한국트레킹클럽이 결성되었고, 2002년엔 국립국어원에서 ‘도보여행’으로 다듬은 말까지 제시했으니까요. 두산백과에 따르면 국내에서는 특이하게도 유적지 탐방이나 섬 여행, 밤 줍기 등 주제를 정해놓은 도보여행으로 트레킹이 대중화되었다고 하는데요, 사실 트레킹은 히말라야 등 험한 산악길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정착된 용어라고 합니다. 등반과 하이킹의 중간 형태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장거리 야영여행을 하는 백패킹과는 구별된다고 두산백과에서 설명하고 있더군요. 하루에 걷는 거리는 15~20km라고 하는데요, 산의 높이를 기준으로 할 때 5000m 이상은 등반, 그 이하는 트레킹으로 구분한다고도 합니다. 즉, 트레킹은 ‘해발 5000m 이하의 산을 15~20km 걷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등반보다는 수월하고 하이킹보다 난도가 높은 걷기라니, 기존에 알고 있던 트레킹과는 거리가 멀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트레킹 대신 궁궐 담장길 산책

트레킹의 유래와 정확한 뜻을 알고 나니 ‘궁궐을 트레킹한다’는 표현이 더욱 낯설고 불편합니다. 궁궐과 종묘를 잇는 보행로를 걷는 데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수준으로 걸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요. 여러 사진을 들여다봐도 험악한 등산로나 바윗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푸른 숲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궁궐 담장길이 이어질 뿐이지요. 이런 길은 트레킹이 아닌 산책이나 산보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해설 관광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서울시도 몇몇 시민기자를 제외하곤 ‘도보여행’과 ‘산책’ ‘걷기’란 표현을 일관되게 쓰고 있습니다. 트레킹이란 표현을 찾아볼 수 없었지요. 무분별하게 트레킹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정감 어린 우리말을 사용한 서울시에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덧붙여 국민의 언어 생활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언론엔 더는 불필요하고 경우에도 맞지 않는 영어 사용은 삼가주십사 부탁을 드려봅니다.

여담입니다만, 궁궐 담장길을 걷는 데 ‘도보여행’이란 표현도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도심 속 보행로를 2시간 정도 걷는 데 ‘여행’이란 표현은 과해 보이지요. 볕 따갑지 않은 걷기 좋은 날 편한 신발 신고 궁궐담장 산책길에 나서보는 건 어떠세요? 편안한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산책하다 보면 저절로 휴식이 될 것 같습니다.

곽민정 방송사 보도본부 어문위원<br>
곽민정 방송사 보도본부 어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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